한번 완성된 생활습관은 매우 끈질기다. 이곳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감내하기도 한다. 삶이란 타자와 관계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양향받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나 자신은 성립 불가능하다. 즉 나 자신은 항상 옷을 입고 있다. 나 자신은 타자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부모 그리고 앞선 세대의 유전자가 섞여 만들어진 것이다. 유전적 경향에 성장 과정이 더해진다. 성장 과정에서 타자와 관계하는 동안 사고방식이나, 호불호 생겨닌다. 우리는 개성적인 존재다. 하지만 백퍼센트 자기가 만들어낸 개성은 없다. 개성이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어떤 타자와 어떻게 관계해 왔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개성은 타자와의 만남으로 구축된다. 자신의 성분인 타자가 결국 자신의 욕망이나 쾌락의 원천이다.
언어는 나 자신이 아니다. 언어는 타자다. 그리고 언어는 주변 타자로부터 설치당한 것이다. 우리는 타자가 언어를 어떻게 쓰는지를 흉내 냄으로써 언어를 습득한다. 언어습득 과정에서 우리는 타자로부터 사고의 기본 방향을 설정당한다. 언어는 환경의 '이렇게 행한 '라는 당위, 즉 코드 안에서 의미를 부여 받는다. 그러므로 언어습득이란 환경의 코드를 세뇌 당하는 일이다. 언어를 습득하면 동시에 특정 환경의 동조를 강요 당하게 되어있다. 언어의 의미는 환경의 코드 속에 있다. 사전에 실려있는 것은 말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다. 그저 대표적인 용법에 불과하다. 사전은 사람들이 말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타자에게 점령 당했다. 언어란 독특한 상태로 존재하며 우리 삶을 강력하게 지배한다. 사물은 곧 물질의 세계다. 물질적인 현실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차원으로서 언어의 세계가 겹쳐져 있다. 우리는 언어와 현실을 연결지어 사고하고 행위한다. 언어는 그 자체만으로 가공의 세계를 만들 수 잇다. 그래서 소설이나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능력은 현실적으로 행위하면서 습득하지만, 말 그 자체는 행위에서 따로 뎨어 사용할 수 있다. 요컨대 말장난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말은 레고블록으로 무엇을 만들듯 어떻게든 놀이로서 조합할 수 있다. 언어 그 자체는 현실적으로 무엇을 하는지와 상관없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 이것을 언어의 '타자성'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즉 언어란 현실 전체에 대한 타자인 것이다. 언어는 가상의 존재라 해도 좋다. 가상의 존재인 언어가 현실 전체에 대한 타자로 현실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언어의 타자성때문에 현실과 '언어의 유일하게 올바른' 대응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의 타자성은 환경에 의한 세뇌와 환경으로부터의 탈세뇌, 이 두 원리 모두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인간은 물질적 현실 그 자체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항상 언어라는 필터를 거친다. 아니 그보다 언어에 의해 구축된 현실을 살아간다. 인간은 언어적 가상현실을 살아간다. 가상현실이란 뜻으로 컴퓨터에 의해 만들어진 영상과 소리의 세계를 생생하게 체험케 하는 기술이다. 언어로 구축된 현실은 환경마다 각기 다르게 존재한다. 언어를 통하지 않은 진정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환경에 동조하는 것은 언어적 가상현실을 살아가는 일이다. 어떤 환경, 즉 언어적 가상현실이 인간을 지배하는가하면 해방하기도 한다. 즉 언어는 인간을 조종하는 리모컨이다. 언어에는 전혀 다른 기능도 있다. 언어는 자유롭다. 언어 유희의 자유란 언어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눈 앞의 현실과는 별개로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의의가 있다. 사회를 구성하려면 '멈춰 서서 생각하기'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환경 동조를 강요하면서 동시에 반대로 동조에 대해 거리를 두도록 만들기도 한다. 공부론의 목적은 환경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한 완전한 자유란 없다. 속박 당하는 중에도 벗어날 길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를 얽어매면서도 동시에 벗어나게 하는 것, 우리에게 명령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명령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오직 인간적 세계를 구축하는 언어뿐이다.
동조와 동조 사이에서 언어의 세계가 번쩍인다. 어떤 환경의 동조에서 벗어나려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동조를 익히는 것이다. 동조에서 동조로 이사하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또 타자 의존적으로 살아간다. 다른 방법으로 다시 타자 의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공부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동조로 이사하는 것이다. 두 동조사이에서 우리는 불편함을 경험한다. 혹은 두가지 환경 코드 틈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 다른 동조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려 애쓰지기만 해서는 안된다. 이때 일어날 위화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두 동조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언어의 세계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할 때 일어나는 위화감이 언어라는 존재를 튀어나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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