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은 언어라는 필터를 매개로 현실과 마주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언어의 동조에 익숙해지는 것이 과제다. 사물의 이름, 전문용어, 약어, 특징적인 말의 사용법 등 특정환경에서만 쓰이는 화법을 일부러 사용해야 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자연에게 부자연스러운 화법으로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말만 하고 있다는 느낌, 말이 입에 붙지 않고 겉도는 느낌이 든다. 언어가 불투명한 것이 되어 현실위에 떠 있는 느낌. 낯선 말이 주는 억지로 말하는 느낌은 언어의 불투명성을 드러낸다. 말의 새로운 정의에 금방 적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때 언어는 일시적으로 불투명한 이물이 된다. 소리의 덩어리, 즉 의문의 기호가 된다. 불투명한 이물로서 언어가 현실위로 떠올라 있다. 이 상태가 바로 언어 그 자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으로 성장할지 모르는 불가사의한 일의 상태인 것이다. 아직 발, 눈, 내장 같은 기관이 성장하지 않은 알. 다른 형태로 쓸 수 있는, 알로서의 언어, 그 자체, 이것을 기묘한 조어이기는 하지만 '기관없는 언어'로 부르고자 한다.
우리는 보통 말의 뜻을 알고 있으며 무언가를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뜻을 알 수 있는 말을 도구로 사용한다. 일상에서 언어는 어떻게 써야 할지 잘아는 도구다. 이때 도구가 망가진 상황을 생각해 보자. 고장난 세탁기는 섬뜩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그냥 물건이다. 물질성을 발휘한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물건을 도구로 다루는 일상에서는 사물을 단순한 물질로 간주하지 않는다. 도구가 망가졌을 때 비로소 사물의 물질성이 전면으로 나오는 것이다. 언어도 마치 망가진 도구처럼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물질이 된다는 것은 언어의 경우 단순히 소리가 된다는 뜻이다. 단순히 물질로 변해버린 망가진 세탁기가 발하는 섬뜩함 처럼 그저 소리만 남은 언어의 섬뜩함은 기존의 동조에서 새로운 동조로 옮겨 가는 사이에 나타난다.
언어의 물질성의 핵심은 언어가 지니는 단순한 소리의 측면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 결국은 단순한 소리일 뿐이다. 단순한 소리인 언어에 각 장면에서 용법이 부여된다. 단순한 소리로서의 언어는 언어의 알 상태인 것이다. 사용법을 알 수 없게 되면서 단순한 소리로 탈바꿈 하는 언어, 불투명하게 물질성을 발휘하는 이물이 된 상태가 언어 그 자체다. 이것을 기관없는 언어라 부르기로 하자. 공부는 다음과 같은 인식으로 전개한다. * 위화감이 있는 언어와 만난다. -> 언어의 용법은 변경 가능하다. -> 언어는 현실에서 분리하여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으며, 언어 조작에 의해 무수한 가능성을 그릴 수 있다. 실현 가능한 상황을 언어를 사용하여 상정함으로써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에 나설 수 있다. 말의 나열을 만듦으로써 그것을 기치로 내건 사회운동이 시작되기도 한다. 사전에 실려 있는 일반적인 정의와는 거리가 있는 화법을 용기내어 사용함으로써 시나 소설의 세계가 열린다. 지금 속해 있는 환경에는 없는 가능성을 오직 언어의 힘으로 상상 하는 것, 이것은 문학으로까지 이어진다. 아니, 이것이 바로 문학하는 것이다. 우선 가능성을 형상화 한다. 언어는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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