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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 (지바마사야 지음, 박제

깊게 공부하기란

도구적 언어와 완구적 언어

언어를 일반적으로 도구라고 보는 도구적 사용이 첫 번째 언어사용 모습이다.  환경에 있어서 목적적 행위를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가령 '소금 좀 집어줘'라는 말은 의뢰이다.  상대방을 움직여 소금을 손에 넣으려는 목적으로 하는 말이다. 두번째 단순히 말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언어사용이다. 이것을 완구적 언어 사용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언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무언가 말함으로써 행하는 것을 철학에서는 언어행위라고 부른다. 한편 목적이 확실하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 완구적인 말을하는 경우도 있다. 친구와 다양한 화제를 꺼내가면서 대화할 때는 그저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친구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기'라는 언어행위를 하고 있다 하겠다.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극단적인 완구적 언어 사용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로지 말 자체를 위해 말하는 것이다. 도구적 언어사용은 외부의 어떤 목적을 향해 있다. 반면 완구적 언어사용에서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다. 즉 자기 목적적이다.

 

자신을 언어적으로 해체하기

익숙하고 친숙한 당위에서 다른 당위로 넘어가는 동안,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언어적 위화감을 바라본다. 그런 다음 그 위화감을, 언어를 그 자체로서 조작하는 의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현실에 밀착된 도구적 언어사용에서 언어를 그 자체로서 조작하는 완구적 언어사용으로 이동한다. 도구적 언어를 주되게 사용하는 자신을 파괴한다. 즉 자신을 언어적으로 해체한다. 조각난 언어의 블록이 자유롭게 다시 맞춰져서 다양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결정적인 완성품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다시 블록을 맞추는 놀이가 이어진다. 그런 놀이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그러한 언어유희 상황,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언어적으로 해체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가능성이 연달아 구축되고, 또다시 해체되고, 또다시 구축되는 과정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공부할 때 일어나는 자기 파괴이다, 언어의 불투명성을 깨닫고 언어를 일부러 조작하려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공부에 공통되는 일반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온갖 공부에 공통되는 일반공부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에 대한 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요리나 미용 등의 기술을 배우는 ㄱ서도 결국 독특한 개념과 화법에 의한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다. 일반 공부법이란 언어를 언어로서 조작하는 의식을 키우는 일이다. 그것은 언어 조작에 의해 특정한 환경의 동조로 유착되지 않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일이다. 깊게 공부하기란 곧 언어 편중적 인간이 되는 것

 

한편 환경을 적대시할 정도로 싫어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힘든 환경에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고통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간신히 버티고 있다면 자신은 그것에서 최소한이라도 마조히즘을 작용시키고 있을 터이다. 인간은 어떻게든 고통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아프지만 기분은 좋다는 모순된 상황을 성립시킨다. 인간에게 아무리 힘든 환경이라도 거기에는 동조하고 유착하려는 면이 있다. 환경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도, 혹은 마음을 고쳐먹고 다른 환경으로 도망쳐버려도, 환경과 유착된 자기 자신을 언제까지고 질질 끄록 다니게 된다. 나아가 비판이나 소외감 등의 부정적인 반응 자체가 일정한 동조로 패턴화 되어 있는 즉, 동조를 거스르는 방법으로서의 동조가 형성되는 일이 종종 있다.

 

환경에 비판적이라 하더라도 비판적으로 동조하는 자신을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한경속에 있으면서 거리를 두는 또 하나의 자신이라는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를 언어로서 의식하는 자신이다. 보통은 언어를 언어로서 의식하지 않는 언어 사용이 주를 이룬다. 즉 언어가 투명한 도구로서 목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 즉 도구적 언어 사용 상태다. 바로 이것이 나 자신과 환경의 유착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환경에서 확실히 땅에 발이 닿아있는 언어사용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발밑을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더라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위할 수 있다. 자유로워지려면 즉, 환경의 외부를 열어 적히려면 도구적 언어 사용을 줄이고 언어를 언어로서 투명한 것으로서 의식하는 완구적 언어사용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 땅이 발에 닿지 않는 뜬 언어를 장난감처럼 사용하는 것, 이것이 자유의 조건이다.  언어는 현실에서 동떨어진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다. 자신의 상태가 언어 그 자체의 차원에 편중되어 언어가 행위 위에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깊게 공부한다는 것은 곧 언어 편중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언어 편중적 인간은 이곳에 있지만 어딘가에 떠 있는 듯한 동조에 서툰 말을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