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차원적인(메타적인)근거가 부여된 물음이 연쇄적으로 끌려나오게 된다. 악이란 다른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슬픔에 '어떻게 근거를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나와서 더욱 깊어진다. 또 다른 물음이 나오면 더욱 깊어지고... 이런 식으로 근거 부여의 연쇄는 멈출 줄을 모른다. '불륜은 악이다' 라는 원래의 코드는 상식적인 믿음일 뿐이다. 근거가 빈약하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사고를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궁극의 근거, 즉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커진다. 원래의 코드에 대한 의심에서 도출된 고차원적 근거를 '超코드'라고 부르겠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의 근거를 끈질기게 의심하고 불합리를 밝혀 내어 상대방이 원래 가지고 있던 신념(코드)이 얼마나 허접한지 폭로하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소크라테스의 기법을 고대 그리스어로 ‘에이로네이아 eironeia (시침떼기, 알면서 딴 전 피우는 것) 라고 한다. 이 말이 아이러니의 어원이다. 초코드는 원래의 코드를 파괴하고 환경을 점령해 버린다. 그 초코드도 또 의심의 대상이 되고 또 다른 초코드에 의해 파괴된다.
아이러니컬한 이야기 전개란, 무한히 멀리 있는 궁극의 근거를 향해 이야기를 깊게 만든 후에 또 파괴하는 것을 반복하는 일이다. 깊은 이야기로 더 깊은 이야기로 의심을 쌓아가다보면, 결국 무엇을 믿고 이야기하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된다. 바꿔 말하면 초코드화를 진행하다보면 코드 부재의 상태에 가까워진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하는 대화 코드에 대한 의심은 점차 말 하나하나의 의미, 정의에 대한 의심으로 변해간다. 악이란 진정 어떤 의미인가? 결국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무엇이든 악이라고 부르자면 부를 수 있을 테고, 악이 아니라고 말하자면 할 수도 있다. 우리는 환경 안에서 오로지 타자를 흉내내는 방법으로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아이러니는 언어라는 필터를 통하지 않고, 직접 현실 그 자체를 느끼고자 하는 욕망이다. 아이러니는 언어 없는 현실이라는 난센스로 돌진한다. 언어라는 것은 특정한 환경 안에서 쓰이는 용법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언어 사용이란 타자의 언어 사용을 흉내 내는 일이다. 언어를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특정한 환경의 코드에서 이미 사용할 수 있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 단계를 통해 언어와 관계 맺는 법을 변화시켜야 한다. 첫째로 어떤 환경에 묶여있고 그곳에서 보수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상태가 기본 값이다. 둘째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컬(비판적)해지는 단계다. 바깥은 우리 인간을 둘러싼 언어적 가상현실의 절대 외부로 탈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바램이다. 결국 어떤 환경의 바깥에는 다른 환경이 있을 뿐이다. 언어의 환경 의존성을 인정한다. 어떤 환경 바깥에는 다른 환경이 있을 뿐이므로, 이 입장은 '환경의 복잡성=언어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양한 환경사이를 즉 다양한 언어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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