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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 (지바마사야 지음, 박제

새로운 시각을 부르는 유머

 

유머란 코드에서 엇나간 발언이다.  유머는 어떤 새로운 시각을 그 환경으로 데려온다. 아이러니는 근거를 의심하는 것이다유머는 시각을 바꾸는 것이다.  대화에서 어떤 발언이 발생할 때  그 환경 코드의 적용범위 안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시험이 시작된다. 적용이란 틀에 맞춘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대화의 흐름은 하나하나의 발언이 코드에 적절하게 들어맞는지 아닌지, 즉 코드의 적용범위 안인지 아닌지 시험당한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발언이 유머의 효과도 지니는 것이다. 유머에서 코드는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확장된다.  음과 음이 부딪히거나 아름다운 화음이 되기도 하는 음악과 닮은 게 아닐까? 새로운 견해가 원래의 코드를 비튼다.  그러면 원래의 코드는 '음악으로 간주한다'는 다른 코드로 이른바 '코드 변환'된다. 애초에 'A가 나쁘다. B가 걱정이다'라는 코드는 반쪽에는 남아있지만, 나머지 절반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고 만다.  또 다른 유형으로 어떤 전문적인 견해를 꺼내서 갑자기 해설을 시작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나는 겉도는 발언이다.  일상적인 일을 굳이 전문적 시각으로 보려는 상황은 때때로 유머로서 익살스럽다.

 

불륜 뉴스에 대한 대화에서도  '불륜이란건 말이야 음악 아닐까?'라고 이야기 한다면  유머가 된다.  유머에서는 비난할 것에 대해 그건 그렇다 치고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를 비틀어버린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억지로 성립된  '불륜=음악'이라는 등식을 어떻게든 해석해야만 한다.  유머란 이처럼 코드를 접목하는 것이다유머의 재미란 ‘엇 그런 얘기였던가?, 애초에 무슨 얘기를 했었지?'처럼 방향, 즉 목적을 상실하는 감각이다. 유머를 통한 코드의 확장은 원리적으로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코드의 불확정성을 최대한까지 확장해버리면 어떤 발언을 갖다붙여도 이어진다. 이어져 있기만 하다면 해석만 하면된다는 식이다. 유머의 과잉화다.  이것 때문에 무자각적인 여기저기 떠도는 이야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유머의 과잉이란 '코드변환'에 의한 탈코드화다. 이와 달리 아이러니의 과잉은 '초코드화'에 의한 탈코드화다.

 

유머가 과잉 되면 온갖 이야기와 발언이 이어진다.  온갖 말이 이어져서 온갖 영역에서 의미를 생산한다. 말의 용법(의미)은 보통 어떤 환경의 코드에 의해 제한되지만, 코드와 코드가 어떻게든 변환 가능하다면 그 제한은 사라진다. 이러한 귀결을 '의미포화'라고 부르도록 하자. 의미의 극한은 의미 포화의 난센스다. 유머의 견해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코드를 확장한다. 혹은 코드를 변환한다. 엇나간 방향으로 이야기를 넓히는 것은 확장적 유머다. 이제부터 고찰하려는 내용은 이야기속의 세부에 지나칠 정도로 집중해서 이야기를 좁혀버리는 유머다. 이것을 '감축적 유머'라고 한다. 또 하나의 유머, 불필요하게 세세한 이야기, 감축적 유머는 구체적으로는 불필요하게 세세한 이야기라는 인상이 있다. 언어가 언어로서 독립하기 시작하여 그 자리에서 겉돌고 마는 것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코드가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코드 전체가 코드의 일부로 감축되어버리는 상태가 바로 감축적 유머다. 감축적 유머 즉 불필요하게 세세한 이야기는 자폐적인 면을 지닌다. 쉽게 말할 수 있으니 말하고 싶어진다.  지식을 뽐내고 싶다든가,  승인 욕구를 충족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자신 안에서 넘쳐나는 말에 빼앗긴 상태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되든 상관 없지 않은, 본인만 집착하는 무언가가 자신을 움직여서  주절주절 말하게 하는 것이다. 언어에 완전히 점령당한 복화술 인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의 이해를 구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린다. 말하는 것 그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감축적 유머에서는 향락적 집착을 위해 입을 움직인다. 의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향락을 위해서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기 목적적으로 기분좋을 뿐인 언어의 완구적 사용이다.  감축적 유머에서는 이야기를 새부로 축소할 뿐 아니라, 의미의 차원 자체를 감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