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

(21)
성장의 한계 1 지구 온난화라는 재난을 면하려면 경제성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몰아세운다.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구온난화를 막으려면 성장을 포기해야한다는 환경주의자들의 요구가 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예술사가인 케네스 클라크는 근사한 돔과 장식을 선호하던 독일 로코코 양식이 공포가 아니라, 기쁨을 통해 설득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극단주의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항상 공포에 의존하곤 했다. 우리는 기쁨에 의거해 사람들을 설득하기를 원한다. 죄책감이나 처벌, 공포 때문이 아니라 희망에 따라 좋은 삶을 추구하는 비전이 그것이다. 맬더스가 표현했듯이 인구의 힘은 인간이 먹고 살 것을 만들어 내는 지구의 힘에 비해 너무나 우세하기 때문에 인류는 어떤 형태로든 때이른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19세기 거의 ..
행복이라는 신기루2 1974년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경제 성장이 인간의 운명을 개선시키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부유층에 매우 행복한 사람들이 더 많고, 빈곤층에 전혀 행복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행복이 절대적인 부가 아니라, 상대적인 부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부자들의 행복은 서열 맨 꼭대기에 있다는 만족감의 표현이며, 빈민 들의 불행은 맨 아래 있다는 좌절감의 표현이다. 사회 전체의 소득이 얼마나 되든지 간에 부자들은 맨 꼭대기에, 빈민들은 맨 밑바닥에 있기 때문에, 평균 행복수준은 변하지 않는다. 삶에서 최고의 것들-아름다운 주택, 최고 학부, 좋은 차 등- 은 대개 본질적으로 공급이 제한되어 있으며, 그래서 최고부자들만이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
행복이라는 신기루1 진정한 행복은 단순힌 취향과 소박한 덕성의 결실이다. 영국에서 나온 보고서를 보면, 1974년 이후 1인당 실질적인 국민총생산은 2배 가까이 늘었는데도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았다. 생활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소득의 절대적 크기와 행복은 무관해지는 것 같다. 행복을 단일한 차원에서 측정 될 수 있는 하나의 단순하고, 무조건적인 재화로 취급한다는 사실이다. 행복의 원천이나 목적은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고려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것을 더 많이 가졌느냐, 적게 가졌느냐 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거해보라고 하면 당황하게 된다. 그것은 철학적인 개념이다. 아테네의 솔론이 부유한 왕 크로에수스를 방문하였다. 크로에수스가 솔론에게 ..
부의 용도3 경제학자들은 적어도 어느 한도내에서는 욕구의 충족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욕구 자체에 대해서 말하라면, 그들은 애써 무관심한 표정을 짓는다. 로크는 이렇게 말했다. “ 과거의 철학자들은 최고의 선善이 부富인지, 신체적 쾌락인지, 덕성인지 그렇지 않으면 명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헛되이 탐구해 왔다. 그들은 최고 맛이 사과인지, 자두맛인지, 호두맛인지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성적으로 논의했을 것이다” 로크는 '삶의 어떠한 방식도 다른 삶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욕구는 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죄책감도 없고, 잘못일 수도 없는 심리적 사실일 뿐이다.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삶이란 없다. 단지 바람직한 삶의 방식들의 범위가 있을 뿐이다. 고전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필요는 객관적이다. 그것은 삶 또는 좋은 삶..
부의 용도2 기독교의 탄생은 변화의 신호탄이었다. 어떤 목적으로 이어지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질적 욕망이 그 목적의 본성이 정한 규범내에 한정되는한 그 욕구는 잘못이 없다. 탐욕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죄악이다. 이 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자라는 단어의 의미는 돈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만족이란 절대 없다. 탐욕스러운 자에게는 눈에 보이는 종착점이 절대로 없을 것이이다. 중세 후기의 기독교는 상업과 화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당시에는 자본주의가 엄청나게 팽창하던 시대였고, 교회는 그것을 억제할 힘이 없었다. 인도문화에서는 윤리적 물음이 종교적인 물음과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브라만들이 고대법전인 ‘다르마수트라’는 삶의 세..
부의 용도1 경제학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오이코노미케oikonomike이다. 오이코노미케는 가정을 관리하는 기술을 의미하며 포도주 제조법, 노예처벌 등을 포함한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는 농경을 주로 하는 사회였다. 생산의 기본단위는 가장과 그의 가족 및 딸린 식구들, 노예, 이따금씩 고용되는 일꾼들로 이루어진 가정이었다. 가정은 자급 자족적이었다. 화폐는 널리 사용되었지만, 자본이나 신용거래는 매우 드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사유 제1원리'는 인간에게는 모든 생물종들처럼 목적, 즉 어떤 일이 완수 되거나 완성되는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목적을 좋은 삶과 동일시했다. 삶은 삶 자체의 완전함을 이루는 것 이상의 다른 목표는 없다. 멀리 있는 다른 어떤 목표, 회사에서 성공을 이루기 위해 이 ..
파우스트적 협상2 에드먼드 버크는 고전적인 보수주의의 탄식을 대변했다. “기사도의 시대는 갔다. 소피스트 시대, 경제학자, 계산꾼들의 시대가 들어섰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악덕의 활용이라는 맨더빌의 중심 메커니즘은 그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살아가며, 악덕을 해롭지 않은 자연적 성질로 재규정한다는 편리한 방편을 써서 그 악마적 취향을 씻어냈다. 그 후 모든 경제학이 취하는 전략이 되었다. 효용과 선호라는 가치 중립적 용어가 자본주의의 파우스트적 거래를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애덤 스미스는 최선을 다해 상업적 시스템의 좋은 측면을 부각시키려고 애썼지만, 그것이 노동자들의 삶과 성격에 미치는 악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몇가지의 단순한 직업을 그 효과가 아마 늘 똑같거나, 거의..
파우스트적 협상1 케인즈는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앞으로 100년 넘게 우리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것이 반칙이고, 반칙이 공정한 것인양 살아야 한다. 반칙이 쓸모있고, 공정한 것이 쓸모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식과 쾌락과 권력을 얻는 대신 악마에게 영혼을 판 유명한 박사의 이름을 따서 '파우스트적'이라 불린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 '목적없는 성장'이라는 꿈에, '끝없는 부'라는 꿈에 낚여버렸는지... 순진한 유토피아는 게으름과 안락함을 갈망하는 인간들이 영원한 바람의 표현이다. 철학자들의 유토피아, 거기에서 욕구는 단순히 즐겁게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관리의 대상이 된다. 토마스 모어가 1516년에 쓴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계급이 재산을 공유하고, 짧은 근로시간은 기술적 진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