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

부의 용도1

경제학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오이코노미케oikonomike이다. 오이코노미케는 가정을 관리하는 기술을 의미하며 포도주 제조법, 노예처벌 등을 포함한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는 농경을 주로 하는 사회였다. 생산의 기본단위는 가장과 그의 가족 및 딸린 식구들, 노예, 이따금씩 고용되는 일꾼들로 이루어진 가정이었다. 가정은 자급 자족적이었다. 화폐는 널리 사용되었지만, 자본이나 신용거래는 매우 드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사유 제1원리'는 인간에게는 모든 생물종들처럼 목적, 즉 어떤 일이 완수 되거나 완성되는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목적을 좋은 삶과 동일시했다. 삶은 삶 자체의 완전함을 이루는 것 이상의 다른 목표는 없다. 멀리 있는 다른 어떤 목표, 회사에서 성공을 이루기 위해 이 완전함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좋은 삶이란 단지 욕망이 충족되는 삶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올바른 목표를 가르킨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일이란 엄밀히 말해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위한 수단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은 여러 측면에서 탁월한 성격과 지성뿐아니라, 이러한 탁월함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외적인 재화들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더라도 필수품을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잘 살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필수품이란 농토와 그 땅에서 일할 노예, 집, 의복, 가구 등과 같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생각하는 사용가치를 지닌 것들을 말한다. 공정하고 절도있는 사람은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정도까지만 그러한 것을 구할 것이고, 적정 지점이면 멈출 것이다.  그런데 소유물은 사용가치 외 또 다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교환될 수 있는 능력에 따르는 가치이다침대 하나와 돼지 한 마리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좋은 삶에 기여한다. 어떤 침대가 다른 침대보다 나을 수는 있지만, 침대가 돼지 보다 낫다고 말한다면 이는 별로 의미있는 말이 아니다.  5배 더 낫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침대와 돼지를 맞바꿀 때는 혹은, 그 둘을 화폐기준에서 평가할 때는 언제나 바로 그러한 공통의 척도를 미리 상정한다. 이처럼 동등하지 않은 것을 동등한 것으로 전환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를 유지하는 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이며,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도 해결하지 못했다.  교환은 여전히 형이상학적 으로는 터무니 없는 사건이며, 사물의 질적 고유성애 위배되는 일이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은 삶의 구체적 가치를 화폐라는 매개가치로 환원하는 것을 개탄했다.

 

화폐는 에덴동산에 숨어 있던 뱀이다. 원래 본질적으로는 교환의 수단이었던 화폐가 얼마 안가서 목적 그 자체가 되었고, 사용가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집과 농토와 생활도구는 그 진정한 목적을 박탈 당하고, 화폐적 가치의 무차별적인 저장소중의 하나로 변했다. 이처럼 수단이 목적으로, 목적이 수단으로 바뀌는 전도현상은 고리대금업에서 절정에 달했다. 고리대금업은 화폐가 대상으로 삼는 자연, 사물이 아니라, 화폐 자체에서 소득을 얻는다. 사람들은 모든 자질이나 기술을 부를 얻는 수단으로 변모시킨다. 의사들은 오로지 진료비만 생각하면서 환자를 대하고, 군인들은 보수만 염두에 두고 싸우며, 궤변가들은 대가를 얻기 위해서 지혜를 파는 것이다. 사용가치에는 욕구를 통제해 주는 종착점이 있다. 즉 좋은 삶이란데서 멈추는 것이다. 이 지점을 넘어서 계속 더 얻으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화폐는 욕구를 통제해줄 종착점이 없다.  만병통치약 같은 역할을 하는 화폐의 용도는 인간의 욕구 자체만큼이나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 만큼 무한하다.

 

소득이 1000에서 10000으로 늘려야 할 이유가 있다면, 10000에서 100000으로 늘려야 할 이유도 있기 마련이다. 재화는 화폐가치의 저장소이다. 아무리 많아도 충분치 않은 것이 바로 화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화폐에는 충분하다는 개념이 논리적으로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할 나위없이 좋은 건강과 행복은 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부란 없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 ‘부’에서 크레스밀러스가 돈의 신 플루투스에게 말한다.  “아무도 그대를 가질 수가 없어. 다른 것에 대해서는 너무 많다는 말을 할 수가 있지, 가령 사랑이나 빵, 문화, 말린 과일, 명예, 과자, 용맹함 혹은 야심, 권력, 스프같은 것들은 그렇지. 그러나 그대는 아무리 많이 있어도 충분하지 않아.  어떤 사람이 8만 마르크를 가졌고 하자.  그는 더 노력해서 10만 마르크를 채우려고 애쓸 것이야. 또 10만 마르크가 있으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25만 마르크를 갖지 못하면, 인생을 산 보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게 되겠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는 좋은 삶의 비전은 그가 살던 시대와 장소에 다분히 한정된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에서 맛보는 기쁨이나 고독이 차지할 여지가 없었고, 예술적 창조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그것은 그리스 자유인 남자들만의 몫이었다. 여성, 야만인, 노예들은 좋은 사람을 누릴 자격을 박탈 당했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의 용도3  (0) 2014.01.20
부의 용도2  (0) 2014.01.17
파우스트적 협상2  (0) 2014.01.15
파우스트적 협상1  (0) 2014.01.14
케인즈의 오류3  (0) 2014.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