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행복은 단순힌 취향과 소박한 덕성의 결실이다. 영국에서 나온 보고서를 보면, 1974년 이후 1인당 실질적인 국민총생산은 2배 가까이 늘었는데도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았다. 생활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소득의 절대적 크기와 행복은 무관해지는 것 같다. 행복을 단일한 차원에서 측정 될 수 있는 하나의 단순하고, 무조건적인 재화로 취급한다는 사실이다. 행복의 원천이나 목적은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고려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것을 더 많이 가졌느냐, 적게 가졌느냐 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거해보라고 하면 당황하게 된다. 그것은 철학적인 개념이다. 아테네의 솔론이 부유한 왕 크로에수스를 방문하였다. 크로에수스가 솔론에게 물었다. 행복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에 대한 답변이다. “텔루스라는 사람인데 그는 두 아들이 있었고, 그는 오래 살아 손자를 보았고, 손자는 건강하게 자랐으며 수입이 많을 때 죽었고, 또 전쟁에서 명예롭게 죽었습니다. ”그리스어 에서는 행복으로 번역되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찬양하는 존재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사적인 의식이 아니라 공적인 평가의 문제라는 것이다.이 개념은 우리에게는 일부는 행복이고, 일부는 성공이며, 일부는 덕성이다. 행복은 지혜와 덕성을 이룬 결과물이며, 둘다 인간의 힘 안에 있는 것이라고 철학자들은 주장했다.
인간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가장 완전하고 가장 충실하게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인간의 목표이지만 그것은 가난, 고독, 박해, 죽음과 같은 상식적으로 불행이라고 규정되는 조건들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happiness라는 영어 단어는 원래 에우다이모니아와 동일한 어원에서 나왔다. '행복해진다'는 것은 좋은 우연hap인 행운을 누린다는 것, 축복받고 부러워할 만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현대 영어에서는 16세기에 시작된 새로운 의미인, 더 즐겁고 만족스러운 심리상태 라는 의미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언어적 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철학의 발달이다.
한때 행복을 이루는 것들이라 알려졌던 좋은 것들, 즉 부나 명예, 명성 등은 이제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행복의 이런저런 원인으로 보인다. 어떤 것인 진짜 행복인지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보 짓이다. 가장 맛있는 과일이 사과인지, 자두인지, 호두인지를 놓고 다투는 식이 된다. 예전에 경제학자들은 생산의 확대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한계효용학파는 소비의 쾌락을 강조했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우리의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는 것, 가장 바람직하지 않는 것을 희생시켜 바람직한 것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 경제학의 과제라고 했다. 기술적 진보가 기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들이 절대적인 우위보다 상대적 우위를 더 갈망한다면, 그래서 시장경쟁을 제로섬 게임으로 만들어 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한 물음들이 경제학 영역이라는 관할구역에서 심리학 영역으로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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