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버크는 고전적인 보수주의의 탄식을 대변했다. “기사도의 시대는 갔다. 소피스트 시대, 경제학자, 계산꾼들의 시대가 들어섰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악덕의 활용이라는 맨더빌의 중심 메커니즘은 그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살아가며, 악덕을 해롭지 않은 자연적 성질로 재규정한다는 편리한 방편을 써서 그 악마적 취향을 씻어냈다. 그 후 모든 경제학이 취하는 전략이 되었다. 효용과 선호라는 가치 중립적 용어가 자본주의의 파우스트적 거래를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애덤 스미스는 최선을 다해 상업적 시스템의 좋은 측면을 부각시키려고 애썼지만, 그것이 노동자들의 삶과 성격에 미치는 악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몇가지의 단순한 직업을 그 효과가 아마 늘 똑같거나, 거의 똑같은 작업을 수행하는데 평생을 바친 사람은, 이해력이나 창의력을 발휘하여 일어나기 힘든 난관을 극복하는 방편을 알아낼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습관을 잃어버리고, 인간존재로서는 최대한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둔하게 마비된 그의 정신은 그를 이성적 대화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영위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일체의 관대하고, 고귀하고, 온유한 감정을 인식하고, 그 결과로서 사적생활의 수많은 일상적인 임무에서도 어떠한 공정한 판단도 내리지 못하게 만든다.
파우스트는 대단히 독특한 근대적 신화로서, 악은 그저 물리쳐야 하는 부정적 특질이 아니라 인간사에서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힘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베이컨은 근대기술의 예언자였고, 자연을 정복하겠다고 생각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힘은 하나에서 만난다.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데서 결과가 산출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쓴 글은 유명하다. 파우스트의 교훈은 분명하다. 돈은 문화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중세 추종자들의 후계자였다. 자본주의는 한편에서는 타도 되어야 할 악이지만, 또 한편에서는 진보의 빼놓을 수 없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부유해졌지만, 정치적으로는 종속되어 있던 도시의 부르주아 계급은 토지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장원제를 전복시켰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을 체계적으로 수탈하고, 그렇게 수탈한 잉여를 사치, 전쟁, 성당 등이 아니라 자본발달에 사용한 최초의 계급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파괴성에 제대로 된 도덕적 무게를 부여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 그는 공산당 선언을 쓰고 나서 20년 뒤 저술한 '자본론'에서 이렇게 예언한다. “수탈자가 수탈 당한다” 그는 직관적인 경제학자는 아니었다. 마흔살에 경제학을 시작해, 머릿속에 이미 너무 많은 생각이 차지해버렸으니 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오로지 노동력밖에 없는 존재로 만듦으로써 임금으로 지급한 것 이상의 가치를 뽑아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차이가 잉영가치 즉 이윤의 근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선진국 세계는 전례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꾸준하게 성장했다. 심지어 저개발국도 선진국을 따라 잡는 것 같았다.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사라졌다. 이제 문제되는 것은 풍요를 달성하는데 대한 장애물이 아니라, 달성된 풍요를 향유하는 데 놓인 장애물이었다. 우리가 인간본성이라 불렀던 것은 필요 곧, 희소성과 시장시스템으로 인한 필요의 산물이었다. 사랑과 존중이라는 새로운 인간본성 또한 필요법칙에 따른다. 철학자 마르쿠제는 소비지상주의, 광고, 대중문화, 이데올로기가 개인들을 자본주의적 질서에 통합시키고, 비판철학의 모든 전망을 사실상 파기해버렸다. 현대사회는 더 이상 공포는 없다. 테크놀로지가 있으니까. 일자리가 불안정한 세상이 돌아왔다. 더 평등한 소득분배로 나아가던 추세가 뒤집혔다. 창조적 파괴가 돌아왔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 대처 총리 정권 아래서 자본주의는 옛날 해적 스타일인 약탈정신을 상당부분 되살려냈고, 관리되는 풍족함을 발판으로 본능을 해방시킨다는 꿈은 뒤로 물러났다. 마르쿠제 스스로도 사회변화를 봉쇄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인정했다. 자본주의는 섹스혁명을 매우 성공적으로 상업화 하고, 흡수해 확실하게 판매 가능한 산물로 바꾸어 놓았다. 범죄적인 것이든 혁명적인 것이든, 폭력은 엔트테인먼트 산업의 표준부품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파우스트적 협상을 기초로 세워졌다. 탐욕과 고리대금이라는 악마는 인간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준다음 무대를 떠날 것이라는 조건 아래서 해방되었다. 풍요의 낙원이 도래할 것이고, 모든 인간은 과거의 행복한 소수사람들이 살았던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행복한 시간이 오리라는 데는 모두들 동의했다. 그렇지않다면 그러한 고생과 불쾌하고 변형된 감정을 왜 감내하겠는가? 그러나 동화가 항상 그렇듯 악마의 계약은 말뿐이다.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는다. 풍족한 낙원은 오지 않고, 짓밟고, 밀치고, 서로를 딛고 올라서 무자비하게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태들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계속될 우리의 운명이다. 자본주의가 기대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욕구의 끝없는 확장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헤아릴수 없는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부가 주는 진정한 편익을 앗아가 버렸다. 자본주의가 뭔가 더 고상한 것으로 진화할 자발적인 경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졌다.혼자 내버려두면, 욕구 생성의 기계는 멈추지 않고, 의미도 없이 영원히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