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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

부의 용도2

기독교의 탄생은 변화의 신호탄이었다. 어떤 목적으로 이어지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물질적 욕망이 그 목적의 본성이 정한 규범내에 한정되는한 그 욕구는 잘못이 없다. 탐욕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죄악이다. 이 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자라는 단어의 의미는 돈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만족이란 절대 없다. 탐욕스러운 자에게는 눈에 보이는 종착점이 절대로 없을 것이이다.  중세 후기의 기독교는 상업과 화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당시에는 자본주의가 엄청나게 팽창하던 시대였고, 교회는 그것을 억제할 힘이 없었다. 인도문화에서는 윤리적 물음이 종교적인 물음과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브라만들이 고대법전인 ‘다르마수트라’는 삶의 세가지 목표를 이야기한다. 다르마(법, 혹은 정의), 아르타(부), 카마(쾌락)그것이다. 법과 이윤이 충동할 때 이윤을 선택하는 자에게 가혹한 고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망고나무를 심으면 열매를 따게 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그늘과 향기도 생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법을 따르면 다른 혜택도 함께 얻는다. 부에 대한 욕망은 생명에 대한 욕망 만큼이나 질기고 또 헛되다. 갈망은 나이와 함께 약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평생 지속되는 질병이다.

 

중국 전역의 상점과 식당에는 불룩한 배를 하고, 유쾌하게 웃고 있는 불상과 부를 상징하는 신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부를 사랑한다고 해서 고대 중국이 부의 축적 자체를 목표로 하는 문명은 아니었다. 유가의 문인들에게 부유함은 교육과 관직을 얻는 수단이었다. 철학적 성향을 띤 도가에게 부유함은 경험을 넓힐 여가를 주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중국 격언은 관직에 있을 때는 유가, 은퇴하고 나면 도가라고 한다. 영어로 신사로 번역되는 군자는 禮를 공부해야 한다고 한다. 禮란 제의적 적절성의 규범으로서 기술적 전문성이 아니라, 전방위적인 교양을 쌓는 것으로 군자의 목표였다. 관료적 중앙집권제에서 시와 철학에 험뻑 젖었을뿐, 다른 지식은 거의 없는 남자들에게 수백년동안 국가의 관직을 맡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청나라 말기에 중국이 몰락하게 중요한 요인이다.

 

현실적으로 관직이 매력을 주는 이유는 관직이 가져다주는 수뢰의 기회때문이였다. 유가가 엄숙하고 현실주의적이라면, 도가는 시적이고 이상주의적이다.  도가의 분위기는 비극적이지 않고, 아련하게 갈망하는 분위기다. 그러한 덧없는 시간의 흐름에서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아름다움의 순간은 여전히 포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순간을 맛보는 것이 도가적 삶의 기술이다. 17세기 문필가 진생탄(金聖嘆)이 쓴 ‘서른 세가지 행복한 순간’에 들어 있다.  “식사 뒤 할 일이 없으니, 낡은 고리 짝에 들어 있는 물건을 정리하기로 했다. 돈을 빌린 사람들이 맡긴 차용증 수백장이 있었다. 죽은 사람도 있고, 갚을 능력이 안되는 사람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도 있지만 돈을 갚을 능력은 없다. 차용증 무더기를 쌓아두고 불을 붙였다. 맑은 하늘에 한줄기 연기가 사라진다. 이게 행복 아닌가! 누군가 죽어 탄식 소리가 들린다. 마을에서 제일 영악하게 굴고 잘난 척 하던 작자가 죽었다 이게 행복 아닌가. 한 여름날 오후에 싱싱한 수박을 잘라 큰 쟁반에 놓았다. 이게 행복 아닌가. ...“

 

진생탄의 행복 목록은 자기완성을 위한 노력이나 자기 희생도 없다. 그저 행복한 몇 순간을 두서없이 기록한 것 뿐이다. 어떤 것은 관대하고, 어떤 것은 변덕스럽고, 어떤 것은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다. 잔생탄이 열거한 이 경험들을 맛보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만나게 되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매력에서 나온다. 기원전 1세기 역사가 사마천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부에 대한 욕망은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모든 인간본성에 원래 들어있는 부분이다. 처녀들이 얼굴을 단장하고 춤을 추며, 눈짓과 손짓으로 상대방을 홀리는 것, 후원자를 만나기 위해 천리길을 마다 않고 내달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그 여자들이 부를 쫓기 때문이다. 관리들이 문서와 인장을 위조하고, 이러한 일이 발각되면 그들에게 가해질 참형도 무릅쓰는 것은, 그들이 뇌물의 맛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지혜를 다하고, 능력을 다쏟아 그저 돈을 모으려 애쓴다. 돈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 생각할 힘을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다.“

 

성장을 옹호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뭐라 말하든간에 돈 그 자체가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라, 삶의 좋은 것들을 누리기 위한 수단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종잇조각 한 묶음의 자극을 좀 더 얻어려고 건강과 사랑과 여가를 희생시킨다면, 그보다 더 바보같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많은 교사들이 도덕적 물음이나 미학적 질문을 던져 학생들의 흥미를 끌어보려 애써지만, 학생들은 그저 지겹다는 듯이 경멸조로 그런 건 각자가 판단할 일 아니냐고 대답할 뿐이다. 좋은 삶과 같은 것이 없다면 획득은 절대적인 목표가 아니라 ‘누구만큼’ 혹은 ‘누구보다 더 많이’라는 상대적인 목표만 남는다모든 내재적인 목적들이 소멸하면 우리에게 두가지 선택이 남는다. 남보다 앞서거나ㅡ 뒤처지거나 둘 중 하나 뿐이다. 자리 싸움이 우리 운명인 것이다.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다면, 남보다 앞서는 것이 최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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