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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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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세상과 함께 늙어가는 일이란 불교경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소치는 사람이 채찍으로 소를 몰아 목장으로 돌아가듯 늙음과 죽음 또한 그러하네 사람의 목숨을 끊임없이 몰고 가네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끝이 없이 타고 있는데 그대들은 어둠 속에 덮혀 있구나. 그런데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
아무도 칮아오지 않는 곳에서 나는 모든 이를 만나러 간다. 어느 날 스님이 찾아와 중국의 선사禪師 동산에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찾아오면 이를 어찌 피해야 합니까?’ 이에 동산이 대답한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자 스님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가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이에 ..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 늙어버릴 것을 저 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저를 사려 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크나큰 지혜의 창고를 다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저도 결국에는 친구가 몇 명 남아 있어야 하겠지요. 끝없이 이 애기 저 애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을 향해 날아가는 날개를 주소서. 제 팔다리, 머리, 허리의 고통에 대해 아예 입을 막아주소서. 제 신체의 고통..
시비를 말라 우울증이 찾아오면 자연 술을 찾게 된다. 나는 위스키 같은 독주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머리 맡에 위스키 병을 놓고 지낸다. 잠 잘 때 서너 잔 마시고 잠이 들곤 했는데 이것도 버릇이 되는지 술기운이 없으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가 막막하다. 하루하루가 건너지 못..
산중일기- 자비 내 얼굴은 이 알 수 없는 미지의 인생극장에 배우로 찾아온 내가 잠시 빌려 쓴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내 얼굴은 빌려 쓴 이름과 더불어 내가 빌려 입은 껍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 얼굴 모습이 잠시 빌려 쓴 탈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동안 소중히 보관하고 간수해야 할 ..
산중일기(최인호)-가정, 그리고 나 밖에서 존경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밖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내로부터 인정 받는 남편은 드물다. 서로 모르는 타인끼리 만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과 더불어 온전한 인격 속에서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서로의 약속을 신성하게 받아들이고, 손과 발이 닳을 때까지 노동으로 밥을 벌어먹으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다가, 마치 하나의 의복이 불에 타 사라지듯이 감사하는 생활 속에서 생을 마감할수 있는 가족이라면 그들은 이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성인聖人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이야말로 하나의 엄격한 수도원인 셈이다. 언젠가 나이드신 부모님은 돌아가실 것이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또 죽을 것이다. 자식들도 결혼을 하고 어느날 내가 손자..
산중일기(최인호)- 느리게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눈이 멀어지면 마음이 더 가까워지는 법이다. 낯익은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공부할 때 낯익혔다고 해도 아는 것이 아니므로, 실제 시험을 보면 틀릴수 밖에 없다. 공부는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친구를 사귀면서 이해타산이나 선입견 없이 그저 천진한 동심으로 만난다. 그때 사귄 친구들은 마음 한복판에 깊게 각인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이들어 최근에 만난 사람들은 그저 낯익을 뿐이다. 애초부터 그 만남이 어떤 목적을 지닌 만남이거나 사교적인 모임인 까닭에 내 두 눈은 그들의 얼굴을 스쳐 지난갈 뿐이다. 낯익을뿐 마음으로 기억되지 않는 그런 관계였기 때문이다. 서양 속담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서양의 물질주의가 빚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