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멀어지면 마음이 더 가까워지는 법이다. 낯익은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공부할 때 낯익혔다고 해도 아는 것이 아니므로, 실제 시험을 보면 틀릴수 밖에 없다. 공부는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친구를 사귀면서 이해타산이나 선입견 없이 그저 천진한 동심으로 만난다. 그때 사귄 친구들은 마음 한복판에 깊게 각인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이들어 최근에 만난 사람들은 그저 낯익을 뿐이다.
애초부터 그 만남이 어떤 목적을 지닌 만남이거나 사교적인 모임인 까닭에 내 두 눈은 그들의 얼굴을 스쳐 지난갈 뿐이다. 낯익을뿐 마음으로 기억되지 않는 그런 관계였기 때문이다. 서양 속담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서양의 물질주의가 빚어낸 격언이다. 진심으로 마음이 가까운 사람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이 더 가까워져야 하는게 아닌가?
눈에서 멀어진다고 해서 마음이 멀어지는 것은 참사랑이 아니다. 참사랑이라면 눈에서 멀어지면 더 애절하게 마음이 더 가까워져야 한다. 눈에서 멀어졌다고 마음까지 멀어진다면 참 우정이 아니다. 참우정이라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그만큼 더 가까워져야 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남의 눈에 띄어야 유명해지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나타나 보이는 것은 결국 쇼윈도에 내걸린 마네킹이나 마찬가지다.
성미가 급한 나는 지금까지 모든 일을 비교적 빨리빨리 처리해 왔다. 나는 그래서 느릿느릿하는 것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느린 사람은 자신이 여유있다고 미화하지만, 실은 대부분 그런 사람은 게으른 경우가 많다. 느리다는 개념과 천천히라는 개념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린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에 여유를 갖고 천천히 한다고 변명하지만, 실제는 방만한 경우가 많다. 느린 사람은 일을 결정하지도 못하고 마무리 하지도 못한다. 그에 비해 빠른 사람은 실수는 있지만 일을 추진해 낸다.
나도 요즘은 천천히 글을 쓰고 싶다. 이것은 요즘 인생을 설계하는 내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다. 나는 한자한자 또박또박 글을 쓰고 싶다. 삶 자체도 그렇게 변화해서 살고 싶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천천히 차를 몰고, 천천히 책을 읽고, 천천히 잠을 자고 그러나 천천함이 지나치는 않게.
나는 무엇을 이루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무엇을 하건 그것을 승부로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고, 붓글씨를 배우는 학동처럼 처음부터 배울 것이다. 무슨 공모전에 나가기 위한 것도 아니고, 뽐내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듯 붓글씨를 쓸 것이다. 싫증도 내지 않고, 지나치게 매달리지도 않고, 무엇을 이루려 밤새워 연습하지도 않을 것이다. 못쓰면 못쓰는 대로, 소질이 없으면 소질이 없는 대로, 멋부리지 않고 한자 한자 소박하고 정확하게 마음이 담긴 붓글씨를 죽을 때까지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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