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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에세이

조용히 세상과 함께 늙어가는 일이란

 

불교경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소치는 사람이 채찍으로 소를 몰아 목장으로 돌아가듯

늙음과 죽음 또한 그러하네

사람의 목숨을 끊임없이 몰고 가네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끝이 없이 타고 있는데

그대들은 어둠 속에 덮혀 있구나.

그런데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죽음에 둘러싸인 삶 속에서 우리의 등불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황량한 도시의 어느 곳에서 벌들이 날아오고, 이 도시의 어느 곳에서 나비는 살아 날아다니고 있음인가.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가는지 알수 없는 바람도 그냥 제멋대로 불어가는 것이 아니어서,  꽃가루

들도 함께 실어날라  꽃사과의 꽃잎을 떨어뜨리더니, 어느세 저희들끼리 짝짓고 저희들끼리 신방 차리고

임신하게 하여 어느 날 나무 가지가지마다 꽃사고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게 한다.

 

그들을 위해 내가 따로 할 일은 없다그저 내버려 두면 그 뿐일 것이다태양은 제가 알아서

열매를 숙성시키고, 때 맞춰 내리는 빗물이 그들의 갈증을 채워주고, 메마른 나무의 뿌리를 적셔

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어느 철학자의 말 처럼, 인간은 누구나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기 시작한다인간은 누구나 감기나 암이나 치질과 같은 뚜렷한 중세가 있고, 고통이 있는 질병들을

병이라 받아들이면서 죽음이라는 만성 질병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을 재수 없는 것, 불길한 것,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될 수 있는 한, 이를 잊어

버리려 한다. 즐겁고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 인생에서 굳이 비극적인 죽음의 그림자를 새삼스레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애써 부정한다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두려움과 공포다. 간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공포야 말로 인간이 지닌 원죄다.

 

죽음이란 피한다고 애써 잊어버린다고 미룬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중에 허둥지둥 준비도 없이 죽음에 의해 피살되어 버린다. 마치 형기가

되어 교수대에 매달리는 사형수처럼.

 

인생이란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으로 짜여지는, 그 안에서 만남과 헤어짐이 어우러져 가로 세로로 직조

되는 한벌의 옷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면서 삶이란 옷 한벌을 받았고, 그 옷에

새겨진 무늬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이 땅에 머물다 간다. 우리 삶에 입혀진 무늬가 서서히 먼지로 사라져

갈 때까지, 삶의 무늬들이 다 닳아 없어져 반들반들한 땅이 될 때까지

 

어느 날 조주스님이 찾아온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여기에 온적이 있는가?

온적이 있습니다.

차 나한잔 마시거라.

또 어떤 스님에게 조주스님이 물었다.

여기 온적이 있는가?

처음입니다.

차나 한잔 마시거라.

 

이에 원주가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어째서 온적이 있는 사람에게도 '차나 한잔 마시라' 하고 ,

처음온 사람에게도 차나 한잔 마셔라 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조주스님이 원주에게 말했다.

'차나 한잔 마시거라.'

 

우리 일생이 불과 차 한잔 마시는 일이나 다름 없다는 뜻인가?

우리는 한 발자국 먼저 가기 위해 남을 모함하고, 시기하고, 싸우거나 증오하며 때로는 전쟁도

불사하며, 타인의 목숨을 너무나 쉽게 앗아가고 있다. 먼저 가나 이제 처음 오나, 우리 삶은 그저

차 한잔 마시는 일에 다름 아닌 데도 우리는 아무것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 '산중일기' 최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