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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한국사10

러일전쟁 중에도 일본의 공사 하야시는 조선의 외부대신 이지용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해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으로부터 징발할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일본총리와 미국 대통령 특사와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교차 승인해 주기로 약속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조선을 소유한다는 뜻이었고, 가쓰라데프트 밀약은 그 소유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이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일본은 고종에게 회유와 협박을 가했고 여덟 명의 대신들 가운 다섯 명이 찬성함으로써 을사보호조약이 통과되었다. 을사오적은 고종을 포함시켜 을사육적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에 휘둘리고 아내 치마폭에서 지내고 국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자주국권을 수호하려는 애국단체를 탄압하는 행동을 한 고종은 무책임한 매국노이다.

 

조약체결이후 초대 조선통감이 된 이토는 이완용을 시켜 고종에게 헤이그사태 책임을 추궁하면서 제위에서 물러나고 아들에게 섭정을 시킬 것을 강요했다. 순종이 즉위하자 불과 사흘 만에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제 일본은 조선에서 독립국으로서의 권리만이 아니라 속국으로서의 권리마저 모두 빼앗았다. 왕실이나 조정의 일부대신들처럼 소극적 저항이 아니라 무력으로 저항하는 의병들이 일어났다. 구국을 모토로 삼은 의병들은 신분의 차별도 나이도 구분 없었다. 그러나 비조직적인 의병활동은 우수한 화력을 무장한 상대가 되지 못했다. 통탄할 일은 의병을 색출하는 데 조선인들이 앞장섰다. 친일 민간단체 일진회가 특히 그악스럽게 굴었다. 의병운동은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위축되었다. 그러나 테러는 특정인물을 겨냥하기 때문에 더 무서운 저항방식이었고 장기적인 무장투쟁이 될 수 있었다. 저항세력은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로 거점을 옮겨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그런 항일운동가 중에 안중근이 있었다. 하얼빈에 온 이토를 안중근이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토가 죽으면서 통감자리는 테라우찌 마가다케로 넘어갔다. 데라우치와 이완용은 비밀리에 만나 합병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왕조는 건국한지 519년 만에 문을 닫았다. 조선은 1800연대 정부가 죽으면서 없어져야 할 왕조가 100년 이상 온갖 추한 꼴을 보여주면서 존속했다. 우리 역사에서 한일합병은 일본이 조선국민에게서 나라를 빼앗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교묘하게 이완용이라는 조력자를 이용하여 작업을 진행했다. 도덕적 비난을 받을 수 있겠지만 법적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순종과 이완용에게 물어야 한다. 굳이 표현한다면 한일합병은 조선의 지배층이 조선의 소유권과 지배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사건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소유는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이므로 나라의 소유자는 바로 왕이었기 때문이다. 한일합병은 조약의 취지로 보면 일본과 조선을 한 나라로 통합하는 조약이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조약의 제1조가 대한제국 황제 폐하는 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라고 되어 있으니 합병조약이라 볼 수 없다. 전통적으로 한반도 왕조들은 왕토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전국의 모든 재산은 부동산은 오로지 왕의 것이라는 말이다. 농민들에게 경작권은 인정되었으나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합병이란 이제부터 일본과 한반도는 하나의 제도를 적용한다는 뜻이다. 일본은 한반도 농민들의 토지를 송두리째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취지에서 시행된 것이 토지조사사업이다. 대지주는 건드리기 어려우니까 등기화 하여 인정해 주었고, 소유권을 확실하게 인정해 줄 수 있는 농민들의 토지도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다. 자기 땅으로 알고 대대로 경작해 오던 많은 농민들은 새로운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고 땅을 부쳐 먹거나 아니면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토지조사 사업으로 많은 농민들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이 과정을 가속화 시킨 것이 합병 전에 조선과 일본이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 이 회사는 조선농민들로부터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련한 토지를 일본에서 조선으로 온 이민자들에게 팔았다.

 

당시 유럽은 물론 동북아시아의 일본과 중국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는 1차 세계대전이었다. 영국 ,프랑스 등 선진제국주의 열강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후발제국주의 열강이 도전한 이 전쟁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영국, 프랑스의 연합국측에 가담하게 된다. 연합국측은 아시아에서 제 몫을 해주는 일본이 기특했고 일본은 독일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이권을 승계하고 나아가 만주지역의 개발권마저 차지하게 된다. 신흥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을 축으로 아시아의 제국주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게 연합국 측의 의도였으니, 중국의 사정은 배려되지 않았고 일본의 중국침략을 공식 승인한 셈이다. 조선에서는 10년 동안 일본의 강압적인 지매에 대한 반일 감정이 축적되었을 뿐 아니라 행동으로 표출될만한 분위기도 팽배해 있었다. 19191월 고종이 죽자 28일 도쿄유학생들의 독립선언으로 31일에 저명인사들이 모여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려면 지도부가 필요했다.그래서 19194월에 중국 상하이에 정치망명객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서양의 선진 제국주의와 갈등을 키워가는 중이었고 일본에 병합된 조선이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으며, 그 투쟁을 주도하는 주요한 세력은 20세기 중반에 이후 새로운 체제로 등장하게 되는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당대에는 당대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다. 지나고 보면 알 수 있어도 막상 그 시대에는 정체를 알기 어렵다.

 

인류최초의 세계대전은 폐전국만이 아니라 전승국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연합국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지 않은 곳은 미국과 일본이었다. 종전 직후 윌슨 미국 대통령의 주창으로 결성된 국제연맹에 일본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당당히 이사국으로 참여함으로써 세계 5대 강국이 되었다. 일본은 유럽열강 어느 나라에도 뒤질게 없는 경제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서양식 제국주의로 성장할 자격을 갖추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없었다면 일본은 정상적인 제국주의 길로 나갔을지 모른다. 일본정부는 공황사태에 대해 서유럽국가들과 공동대응을 모색했고 금융지원을 받아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군부가 제시한 해법은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고 중국을 정복해 경제위기를 타개하자는 것이었다. 정부와 군부의 싸움에서 군부가 승리하였고 군국주의가 채택되었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불과 닷새만에 랴오뚱 일대를 손에 넣었고 두 달 뒤에 만주전역을 장악했다. 당시 중국이 만주를 쉽게 포기한 것은 역사적으로 만주에 대한 집착이 덜한 전통도 작용했을 것이다. 신해혁명을 청이 무너진 것은 제국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과 동시에 이민족의 지배가 끝난 것이기도 했다. 만주는 청황실의 고향이었고 역사적으로 한족 세력권이지만 영토는 아니었으므로 당시 중국 집권세력인 국민당은 만주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됨에 따라 조선의 항일운동도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1926년 순종 장례식에 맞추어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 학생들과 연대하여 대규모 시위를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이렇게 탄생한 민족운동통합조직이 바로 신간회였다. 하지만 지도부가 분열되어 1931년 와해되고 말았다. 항일의 구심점은 북쪽으로 가게 되었고 남만주 일대에는 고향을 떠나온 조선인들로 또 하나의 조선이 성립되어 있다. 이를 배경으로 만주에서 본격적인 항일투쟁이 시작되었다. 항일투사의 사관학교인 신흥문관학교를 비롯해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 등 무장조직들이 결성되었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김좌진의 지휘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중국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항일세력과 통일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3.1운동이 임시정부와 공산당을 낳았듯이 중국의 5.4운동은 중국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항일운동 지도부를 탄생시켰다. 중국은 일본 식민지가 아니고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본산인 소련의 도움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합작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나 이내 합작이 깨어지면서 소련 측과도 멀어졌다. 소련유학파 지식인들이 물러나고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당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인물이 마오쩌뚱이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결별하게 된 것은 장제스가 어처구니없게 항일보다 공산당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국공합작을 주도한 쑨원이 죽자 장제스는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합작을 깨버렸다. 지독한 권력욕과 반공주의자라는 점에서 닮은 사람이 이승만이다. 그는 미국에서 빈둥거리면서도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요구헀고 무능한 임시정부가 그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외교를 핑계로 미국에 머물렀다. 해방직후에도 한반도에 머물면서 민족지도자 김구는 물론 미군정에서도 권하는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항일이라는 민족 과제보다 자신의 권력을 추구했고 끝내 남북분단을 초래한 점에서 이승만과 장제스는 닮은 꼴이다. 그들은 독재자가 되어 두 나라의 현대사를 얼룩지게 만들었다.

 

중국정부의 분열로 위기감을 느낀 중국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민족 통일전선을 수립하자는 8.1선언을 발표했다. 만주의 조선계 항일투쟁조직들은 중국공산당 홍군에 속해 항일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만주일대에서 턱없이 부족한 화력과 보급품에서도 오로지 불굴의 투지만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조선의 독립군에게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무엇보다 지도부가 생겼다는 것과 일본군과 정식으로 싸울 수 있게 된 것이 큰 보람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파시스트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이 홍군을 화북 담당 팔로군과 강남 담당 신사군으로 재편되었을 때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만주의 조선유격대는 팔로군에 속하게 된다. 동북항일연합군과 팔로군에서 조선인 유격대는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한부대의 지휘관이 김일성이다. 민족지였던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지면을 타고 만주 항일 유격대 대명사처럼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중국군은 홍군과 조선 유격대까지 가세했지만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이 장악한 중국의 동해안도 남북으로 워낙 넓게 펴쳐진 탓에 점령을 해도 수비가 불가능했다. 만주사변이 끝나자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침략 기지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반도 북부에 군수공장을 설립하고 남부에서는 미곡 공출량을 크게 늘린 것이었다. 어떻게 하든 조선의 인적 물적자원을 전쟁에 동원하기위하여 총독부는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라는 일체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건 구호가 皇國臣民化內鮮一體였다. 뜻으로는 조선과 일본이 또같다는 것이었다. 한극교육을 일체 금지하고 일본말만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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