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조씨 우두머리인 조만영의 딸이므로 후대 조대비로 잘 알려진 신정왕후는 가문을 부활시키려 했다. 순정왕후가 장헌세자 서자인 은언군 후손에서 철종을 발견했다면, 조대비가 찾은 인물은 은언군의 동생인 은신군의 손자 이하응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흔이 넘은 나이였기 때문에 너무 늙은 나이다. 그에게 명복이란 열한살 짜리 둘째 아들이 있었다. 아들을 왕위를 올리려는 이하응과 조대비가 의기투합하여 조선이 26개 왕인 고종을 즉위하게 한다. 조대비가 수렴청정 하는 것으로 고종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몰락한 풍양조씨는 조대비 소망과 달리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권력은 이하응에게로 옮겨왔다. 대원군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주체적인 종교이념인 동학 출현했기 때문이다. 동학이 목표는 서학보다 유학이었다. 동학 창시자 최제우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친다. 사회적 신분도 다르고 경제적 계급도 다른데 어떻게 평등할 수 있을까? 누구나 자기 안에 찬주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신분과 계급이라는 인간세상의 기준으로 평등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질서인 중화적 질서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는 신분의 구분은 당연한 것이었다. 동학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게 하늘의 질서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탄압하기 시작했다. 동학을 서학의 변종이라고 간주했다. 탄압의 진정한 이유는 동학이 서학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리학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불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매사에 말을 아끼던 대원군이 제 목소리를 낸 것은 아들이 아내를 얻을 때였다. 조대비는 자기 가문에서 왕비가 나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대원군이 선택한 며느리는 자신의 처가인 여흥민씨 집안이었다. 대원군은 며느리 조건으로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꿈꾸는 조선은 사대부나 세도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체제가 아니라 강력한 왕권이 지배하는 명실상부한 왕국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도가를 뿌리 뽑겠다는 이유로 명성황후를 며느리로 선택한 것은 잘못이었다. 쇠붙이라면 모조리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권력의 속성상 가문에서 왕비가 나왔다는 소식에 민씨 일가붙이들이 총집결했다.
철종 치세 후반부터 유럽의 상선이나 군함이 조선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부쩍 잦아졌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유럽열강이 제국주의적 대외진출을 시작한 것이었으나 이제 막 왕국으로 옷을 갈아입으려는 대원군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그는 서양세력의 통상요구를 수락한다면 조선이 존립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것이 대원군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척화론이다. 그는 원래 서학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조정도 여전히 성리학 이념만을 초지일관 고수하는 자들이 대다수였다. 대원군이 척화로 간 것은 갓 잡은 권력을 안정시키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 봐야 한다. 대원군의 측근 인물인 그리스도교도 남종삼은 영국, 프랑스와 결탁하여 러시아 진출을 막자는 제안을 했다. 대원군이 신부를 만난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조정대신들이 거세게 일어나는 바람에 노선으로 급선회하여 사양세력과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 결과가 병인박해였다. 간신히 탈출한 신부 한 명이 베이징으로 가서 프랑스 함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해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다. 통상을 거부하자 선원들은 평양으로 상륙해 행패를 부렸다.
병인박해는 조선이 일으켰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조선이 당한 사건이지만 제국열강의 심기를 건드렸다. 한 달 뒤 프랑스 군함 세척이 인천 앞바다로 왔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 상륙해 순식간에 섬을 점령했다. 하지만 조선의 악착같은 방어에 프랑스 군은 철수했다. 조선은 승지였지만 잃은 게 훨씬 많았다. 큰 손실은 프랑스 군이 철수하면서 300여권의 도서들을 가져갔다. 1871년 미국군함 다섯 척이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통상이라는 명분으로 자행된 제국주의 만행은 오히려 조선의 문을 닫게 만들어 쇄국정책이라는 빗장수비를 초래했다. 미국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미국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철군하고 말았다. 미국은 조선을 영토적으로 차지할 생각이 없었다. 두차례 양요를 겪으면서 조선정부의 노선은 분명해졌다. 원로대신들은 물론이고 소장파와 유생들까지 존화양이尊華洋夷를 외쳤다. 수구의 대통합이 이루어 진 것이었다. 그것은 주체성이나 민족주의와 거리가 멀다. 일종의 오래된 정신병적 현상이다. 조선을 보살펴줄 보호자가 없었다. 사대와 흠모의 대상이었던 중국도 일본도 조선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선은 동아시의 외톨이가 되었다.
중국은 영국의 아편을 불태우면서 영국이 본격적인 침략노선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키고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맺게 된다. 영국에 문을 열어주자 서양열강들이 각종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최제우가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포교하던 무렵 중국에서는 홍수전이 그리스도교와 중국 전통사상으로 만든 상제교를 만들어 반만주족 지배와 반외세구호를 내걸었다. 중국의 동학운동인 태평천국운동이다. 처음에 반란군에 쩔쩔매던 정부군이 서양무기를 제공받고 연전연승하면서 난징을 탈환하고 반란을 종식시켰다. 진압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증국번과 이홍장은 사양의 힘에 감탄하면서 이때부터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이 쉽게 문을 연 이유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에도바쿠후 정권이 오랜 집권으로 부패할 만큼 부패했기 때문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은 왜 일본과 다른 길을 걸었을까? 유교국가가 아인 일본은 지배권력이 부패하면 반란이나 쿠데타가 일어나 새 정권으로 교체될 수 있었으나 조선은 원래부터 골수 성리학 국가인데다 유일한 중화세계로 남았기 때문에 정권교차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일본은 천황이라는 상징적 중심이 있었으므로 설령 쿠데타 세력이 바쿠후 정권을 거부한다고 해도 천황에 대한 반역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젊은 개혁세력이 등장해 미국군함에 굴복한 바쿠후정권을 차도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그들은 바쿠후 정권을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루었다. 당시 천황이 열여섯 살의 메이지 천황이다. 젊은 관료들의 개혁운동은 오랜 바쿠체제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중앙집권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신의 바람은 일본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유신의 이념은 부국강병이었고 이를 위한 수단이 서구화를 통한 근대화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적인 기반에 뿌리를 둔 근대화였다. 유신의 결과물은 일본 특유의 군대식 형식과 내용이 가미되면서 일본식 제국주의, 즉 군국주의였다. 제국주의는 식민지가 필요했고 일본의 식민지 후보는 조선이었다. 당시 유신세력이 정신적 지도자로 여긴 요시다 쇼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 미국과 화의를 맺으면 우리로서는 비록 오랑캐와의 약속일지라도 신의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그 사이에 국력을 배양하여 손쉬운 상대인 조선, 만주, 중국을 취함으로써 교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 입은 손해를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제국주의 가르침은 곧 바로 유신정권이 주도하는 침략적 대외진출로 이어졌다.
열강의 침략으로 국란을 맞았을 때는 이해관계가 맞았지만 대원군과 위정척사파의 밀월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신미양요가 끝나자 대원군은 전국 사원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반대 세력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서원철폐는 조정대신들만이 아니라 성균관 유림세력까지 반발을 부를 만큼 과격한 조치였다. 그리고 고종의 나이 스물이 넘었고 야심찬 아내가 있었다. 집중탄핵을 받은 대원군은 실각하고 말았다. 대원군을 퇴출시키는 조치를 내리는 데는 남편의 친정을 강력히 권유하는 명성황후의 책동이 크게 작동하였다. 대원군의 정적이 된 조대비 세력은 물론 조정의 원로대신들과 안동김씨, 성균관 유생까지 결탁하고 나섰다.
일본이 노린 것은 조선내부의 혼란이었다. 정한론을 실행할 조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조선에서 대원군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졌다. 일본의 좋은 벤처마킹 대상은 미국의 페리에게 당한 서양제국주의의 단골 수법이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으로 전쟁을 먼저 벌인 뒤 외교를 통해 유리한 협상고지를 차지했다. 1876년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국제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언뜻 보기에 조약내용이 불등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1조가 조선은 자주국가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이 자주국가라는 것을 명시했다는 것은 그전까지 조선이 자주국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중국은 조선의 종주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한다 해도 어느 나라도 전혀 간섭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조약에서 한반도의 연해와 섬들만 측정하기로 되어있었으나 일본 정부는 군인을 민간으로 위장시켜 조선전역의 지리와 문물을 조사하게 했다. 조선이나 일본이나 강제로 개항을 하였지만,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아시아 최초의 제국주의 구가로 도약했고 조선은 그 일본에 의해 신흥제국주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전락했다. 조선이 일본에게 뒤처진 이유는 단지 개항이 늦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17세기 중국마저 비중화 세계로 편입된 이후 홀로 남은 조선은 낡은 세계의 수호자가 되는 복고와 보수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를 제압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 대원군이 허무하게 물러나자 그 빈자리를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이 꿰찼다. 수십년 동안 나라를 망쳐 놓은 세도가문이 아주 중요한 시기에 다시권력을 잡았으니 무슨 해법이 있을 수 없었다.
타인에 의한 개화였으나 개화를 주장한 것은 민씨정권이었으므로 개항 이후 민씨 가문은 조정에 비약적으로 진출했다. 민씨 일가가 개화파의 주력을 이루었으나 정작 개화파의 중심인물로 떠오른 인물은 정통 관료출신 김홍집이었다. 김홍집은 사상과 이론으로 무장한 개화파였기 때문이었다. 김홍집은 일본에서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받아왔다. 책의 핵심내용은 러시아 남하를 대비하게 위해 親中 結日 聯美, 즉 중국 일본 미국과 동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화 정부는 일본처럼 군사적 부분의 개혁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았다. 조선내부에서는 유림세력을 중심으로 개화 대한 본격적인 비판도 개시되었다. 영남지역의 유생들이 개화를 비판하고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동안 외세의 공략으로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한 백성들도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보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개화정부가 서양식 군제로 개편을 서두르자 결국 문제가 터졌다.
정부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을 맡겼다. 불만이 쌓인 구식군대에 선혜청에서 급료로 준 양곡에 모래가 섞인 것을 보는 순간 불만은 폭발했다. 임오군란이다. 반란군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맡아들라고 부탁했다. 다시 복귀한 대원군은 모든 것을 10년전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했다. 대원군은 정적 며느리를 물리쳤으나 대신 청과 일본이라는 시어머니가 둘씩이나 달라붙었다. 대원군이 집권한지 한 달 만에 청군이 그를 납치함으로써 임오군란은 끝났다. 청이 쓸데없는 대원군을 납치하는 데 애쓴 대신 실익을 거둔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김홍집과 불평등한 제물포조약을 맺었다. 공사관 수비 병력을 증강하기로 하였고 병력유지비를 조선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명성황후는 부활해 국모로 복귀했다. 조선은 다시 두 파로 나누어졌다. 청을 따르는 파와 일본을 따르는 파로 나누어졌다. 의견이 엇갈리면 대화를 해야 하지만 조선이라는 집안에는 대화는 없었다. 의견이 갈리면 서로 당파를 형성해 이겨야만 했다. 일본의 똘마니들은 친청파를 사대당이라 했고, 청의 똘마니들은 친일파에게 개화당이라 했다. 친일파는 스스로를 독립파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