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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을 놓지 마라 (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 지음, 이승희 옮김)

힘을 잃은 부모들

부모로서의 힘은 모든 일이 순리에 따랐을 때 애쓸 필요 없이 굳이 태세를 취하거나 밀어붙이지 않아도 나오게 되어 있다. 반면 부모로서의 힘이 모자라면 그만큼 목소리를 높이고 무자비한 태도를 보이고 위협을 하고, 아이들이 우리 요구를 듣게 하기 위해 다른 수단을 찾게 된다. 부모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힘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부모역할을 할 수가 없다. 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는 부모역할의 역학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부모로서의 힘은 아이에게서 주의를 집중시키고, 바람직한 태도를 이끌어내고, 부모에 대한 존경을 불러일으키고, 아이의 협력을 보장한다. 이런 네 가지 능력이 빠진 채 강압이나 매수만으로 아이를 설득할 수 있을까?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효율적인 부모역할의 기본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부모의 힘은 기술이 아닌 애착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부모 힘의 비밀은 아이의 의존성에 달려 있다.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 살아나갈 힘이 없이 전적으로 누군가에 의존해야 하는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 의지해 보살핌을 받고 인도와 지시와 지지와 승인을 구하고 안식처라는 느낌과 소속감을 가져야 한다. 부모의 보살핌엔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음식이나 옷, , 그리고 다른 물질적인 부분만 의존하는 아이를 부모가 진심으로 보살필 수는 없다. 자신의 심리적인 욕구를 의존하지 않는 아이를 감정적으로 지지해 줄 수도 없다.

 

또래 관계가 부모와의 애착관계와 경쟁했고 결국 또래와의 결합이 승리한다면 우리는 아이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할 뿐 아니라, 무지하고 부적격한 강탈자들이 우리 아이들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가게 된다. 또래에 대한 의존의 씨앗은 보통 초등학교 때에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또래와 부모에 대한 애착의 양립불가능성이 증가하면서 부모로서의 힘이 파괴는 것 건 중학교 시절이다. 정확히 청소년 시기에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단속이 필요한 때에 부모의 힘은 슬며시 빠져 나간다. 우리 눈에 아이들이 독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의존이 이동한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의존적인 존재인지 의식하지 못한 채 아이들이 스스로 모든 일들을 해나가도록 너무 서둘러 보채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지시하고 스스로 동기부여하고 스스로 조절하고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스스로 확신을 갖기를 바란다. 독립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바람에 아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잃어버렸다. 부모들은 아이가 지지, 사랑, 결함, 소속감의 상대를 찾아 또래에게로 돌아섰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애착의 대상이 바뀌면 의존의 대상도 바뀌다. 그와 함께 힘 또한 그들에게 넘어간다. 인간은 의존의 기간이 길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애착을 옮길 수 있어야만 한다. 부모에게서 친척과 이웃들, 같은 종족, 같은 마을의 연장자들에게로 옮겨져야 한다. 수천 년 동안 부모들과 아이들에게 이로웠던 이런 뛰어난 순응성이 이젠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오늘날 이 순응성은 또래들이 부모를 대신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또래 지향적으로 되었을 때 부모로서의 힘을 상실했음을 느낄 수 있다.

 

부모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의존적인 존재, 기꺼이 그 책임을 지는 어른, 그리고 어른을 향한 아이의 애착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어른을 향한 아이의 애착이다. 많은 어른들은 아직도 양부모로서, 위탁가정 부모로서, 계부모로서 혹은 생물학적인 부모로서, 부모의 자리에 들어서기만 하면 다 해결된다는 오해 속에서 부모 역할을 하고 있다. 즉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의 욕구와 기꺼이 부모노릇을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부모들이 다른 부모들은 자유자재로 아이들을 다루는데 자신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뭔가 필수적인 기술들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또는 단순히 지식의 부족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부모 역할을 배워야 할 기술이라고 인식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읽어야 할 다른 책이 있을 거라고, 들어야 할 다른 부모수업 과정이 있을 거라고, 습득해야 할 다른 기술이 있을 거리고 가정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기술을 습득하기만 하면 아이를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한다.

 

법정은 아이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부모에게 지운다. 부모 역할을 이렇게 기술로 간주하는 것은 끔찍한 실수다. 그 결과 부모들은 전문가들에게 인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고, 부모로서의 자연스러운 자신감을 빼앗겼고, 종종 말문이 막히고 자신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말을 듣게 만드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이 우리말을 듣지 않는다고, 적당한 요령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부모 권위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고 성급히 가정한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기술이 아니라 아이를 책임지고 있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라는 가장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아이의 문제에 대해 부모를 탓하지 않으려면 아이가 이상하다거나 뭔가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리면 된다. 우리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기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아이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위안을 구하는 것이다. 의학적 설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의 복잡한 문제행동이 유전적 현상이나 잘못 연결된 뇌 회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들은 인간의 뇌는 탄생의 순간부터 일생 동안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며, 애착관계가 아이의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무시한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아이들의 문제를 의학적 진단으로 축소시키고 그런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는 심리적, 정서적, 사회적 요인들을 배제한 채 치료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꼬리표 붙이기가 위험한 것은 문제의 원인을 찾아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이는 문제의 진짜 원인을 덮어버린다. 기저에 깔린 관계적 요인들을 무시하고 문제에 대한 진단을 내린다면, 진짜 해결책을 찾는 일은 당연히 지연된다. 부모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가 아니라 관계에서 무엇이 부족한가이다.

 

아이와 애착이 없다면 많은 부모들이 시도 때도 없이 아기 기저귀를 갈고 밤잠을 설치고 소음과 울음소리를 견디며, 감사하는 이야기도 못 들으면서 온갖 뒤치다꺼리를 묵묵히 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좀 더 자란 아이들의 짜증나고 불쾌하기까지 한 행동까지 감내하기는 힘들 것이다. 애착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효과적인 부모역할을 지원한다.

 

애착의 첫 번째 임무는 어른과 아이 사이의 위계를 잡아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게 되면 애착 뇌는 자동적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 우리의 뇌 기관에는 선천적으로 지배적인 쪽과 종속적인 삶, 보실핌을 주는 쪽과 보살핌을 구하는 쪽, 베푸는 쪽과 받는 쪽으로 나누어지는 전형적인 지위들이 새겨져 있다. 지배-의존의 역학이 미성숙한 또래들 사이에서 지배와 복종이라는 건강하지 못한 상황을 만들게 된다. 아이의 애착뇌가 지배적인 쪽을 택했다면, 그 아이는 자기 또래를 쥐고 흔들려고 한다. 이 아이가 인정이 많고 책임감을 느끼는 아이라면 아이들을 보살피고 돌볼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욕구불만에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면 따돌림을 주도할 것이다. 또래지향성이 미치는 최고의 해악은 자연적인 부모-자녀 사이의 위계를 뭉개버린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연적인 순리 안에서 지배적인 역할에 맞게 주어졌던 존경과 권위를 잃게 된다.

 

아기의 애착행동, 즉 빠져들듯 한 두 눈, 사랑스러운 미소, 앞으로 한껏 뻗어 두 팔을 들어 올리면 품에 안겨드니 느낌처럼 사람의 마음속 깊이 호소하는 일은 없다. 이러한 애착행동은 우리 안에 있는 부모의 본능을 일깨우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것은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애착반사에 의해 일어난다. 애착행동이 우리 안에 있는 부모의 본능을 건드리면 가까이 다가가고, 안아주고 싶어지고 책임을 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사실 모든 부모들이 이용당하고 혹사당하고, 노고를 인정받지 못하고 속는다. 우리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지나가는 이유는 애착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동화책 속에서 계모, 계부가 그토록 악명을 날리는 것도 자연적인 상호애착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노고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부모 역할의 일부다. 순수하고 단순한 애착이 있기에 이러한 부모 역할이 가능해진다. 이에 반해서 그런 애착이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되면 부모 역할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고 만다.

 

모든 부모 역할의 기초는 아이가 우리를 쳐다보게 하고 우리의 말을 듣게 하는 것이다. 아이의 뇌는 대부분 무의식적인 역학관계에 의해 주의를 기울일 대상의 우선순위를 배정한다. 무엇보다 아이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애착이기 때문에 이 애착이 아이의 주의를 조정하는 중심역할을 한다. 주의는 애착을 따라간다. 애착이 강할수록 아이의 주의를 확보하는 일은 더 수월해진다. 애착이 약하면 아이의 주의를 끌기 어렵다. 부모들이 끊임없이 하는 잔소리는 아이들의 주의를 끌기 어렵다. ‘내 말 좀 들어, 이것 좀 봐, 내가 방금 뭐라 했어라는 이야기로 주의를 집중시키기는 어렵다. 또래 지향적으로 바뀐 아이들의 주의는 본능적으로 또래들에게로 향한다. 따라서 아이는 어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애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이와의 친밀감을 유지시키는 일이다. 다른 애착동물들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를 눈앞에 보아야 하고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채취를 맡아야 하는 이런 친밀감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자식들을 애착에 힘입어 우리 곁에 붙어있게 만들 수 있다. 아이 발달이 문제없이 진행될 경우, 부모와의 신체적인 밀접함에 대한 욕구는 점차 정서적인 결합과 친밀감으로 발전해나간다. 우리 사회는 휴대폰에서 이메일과 인터넷 채팅에 이르기까지 연락을 유지하는 강력한 기술을 발전시켰고, 또래와의 접촉에 정신이 팔린 아이는 이런 기술들을 가동시켰다. 이와 같이 또래와의 끊임없는 접촉욕구는 가족의 시간을 방해할 뿐 아니라, 아이의 공부와 재능개발을 저해하고 성숙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창조적인 고독을 확실하게 방해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 이상으로 성장하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는 강하게 애착을 형성한 사람들을 자신의 모범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서 우리 삶이 그들의 모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모범이 된다는 것은 애착역학이다. 애착을 형성한 대상을 모방함으로써 아이는 그 사람과 심리적인 밀접함을 유지한다. 중요한 애착대상과 같아지려는 친밀감의 욕구는 아이를 가장 중요하고 자발적인 배움으로 이끌어낸다. 이런 배움은 부모가 가르치려는 의식적인 의도나 아이가 학습한다는 생각 없이 이루어진다. 애착이 없는 경우에 배움은 고역이 되고 가르치는 일은 억지가 된다. 아이가 습득하는 모든 단어를 부모가 의도적으로 가르쳐야 하고, 모든 행동을 의식적으로 일러주어야 하고 모든 태도를 의식적으로 심어주어야한다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라. 배움은 중요하지만 더 이상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더구나 문제 아이들의 행동이나 가치를 모범으로 삼은 것이라면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아이가 모방하는 모범이 우리가 아닐 때 부모역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일이 된다.

 

아이는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을 때까지 자기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본을 따를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신호를 찾는다. 이때 가르침이 얼마나 명확한지 보다는 아이의 애착프로그램이 누구를 따라야 할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는지가 결정적이다. 방향을 잘 가리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지표로 삼는 대상이 부모가 아니라면 아무리 현명하고 분명하게 방향을 일러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애착상실의 결과 아이는 더 이상 우리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의 나침반 방위 역할을 하는 사람이 당연히 아이의 본보기 대상이 된다. 아이의 뇌는 자동적으로 주요 애착을 형성한 사람에게서 본을 찾는다. 본받을 대상의 자리를 부모가 아닌 또래들이 대신하면 아이는 또래들의 기대를 따를 것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참된 자기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아이들의 나이와 성숙도에 맞는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은 아이들의 발달에 중요하지만, 아이에게 지시하는 것 자체를 원칙적으로 피한다면 그것은 부모의 역할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는다. 부모의 지도가 없으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또래들과 같은 대체물에서 모범을 찾는다. 지시를 듣지 않는 아이를 다루는 일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의 지배하에 있는 아이를 통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부모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이의 성숙함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