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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을 놓지 마라 (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 지음, 이승희 옮김)

느낌을 거부하는 아이들

요즘 인터넷 대화에 사용하는 문장은 뜻이 분명치 않은 단음절로 축약하고 있다. 진정한 의사소통이 없는 의미없는 접촉이다.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려는 의도가 없다. 이런 대화들이 의미 없이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것은 자아에 대한 가치는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 접촉하려는 맹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십대들은 어른 사회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전통을 아이들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좌절감의 밑바탕에는 이런 아이들의 종족화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아이들이 속한 각각의 종족 내에서 가치관과 문화는 무지하고 미성숙한 개인에게서 개인으로 수평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세대 간 어느 정도 긴장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개는 아이들이 연장자의 문화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성숙을 유도함으로써 해결된다.

 

문화는 또 접촉과 결합, 만났을 때와 헤어질 때의 인사, 소속감과 충성심, 사랑과 친분과 관련된 의식을 특정 짓는다. 양육에는 이러한 문화의 전달이 자동적으로 포함된다. 아이가 어른과 적절한 애착을 형성하고 있는 한 문화는 아이에게로 흘러간다. 따라서 애착을 제대로 형성한 아이는 어른의 문화 양식을 흡수하면서 자연스럽게 견문이 넓어진다. 미국의 저명한 발달전문가 하워드 가드너에 따르면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4년 동안 부모로부터 저절로 흡수하는 생존을 위한 지식이 나머지 공교육 과정 전체를 통틀어 흡수하는 것보다 많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가 또래 지향적으로 되면 이러한 문화의 전달망은 마비되고 다른 애들이나 또래집단 혹은 대중우상이 모방할 새로운 모범이 된다. 외모, 태도, 복장과 품행 모두가 그에 따라 바뀐다. 아이들의 언어조차 바뀐다. 피폐화되고 자신들이 관찰하고 경험한 바에 대한 표현이 불분명해지고, 뜻과 뉘앙스에 대한 표현력도 떨어진다.

 

또래 지향적 아이들은 전통의 문화 대신 또래지향성이 만든 문화에 영향을 받는다. 광고주들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어린 소비자층을 사로잡으려고 기를 쓰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또래의 문화를 교묘하게 이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또래 지향적인 아이들의 기대에 영합하는 어른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이윤을 얻는다. 친구가 가족보다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서른 살이 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말이 청소년들의 격언이 되었다. 이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을 넘어서 전통에 대한 전투적인 거부에까지 나아갔다. 이 문화가 소외, 마약남용과 같은 타락의 길을 걸은 것은 예측가능한 일이었다. 인류의 성숙한 문화는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되어 왔다. 건강한 문화에는 사회와 자신을 보호하고 인류에게 중요한 가치관을 지키는 의식과 관습, 다양한 방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또래지향성이 만들어낸 문화에는 지혜가 없다. 또 그 구성원으로부터 구성원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 일시적인 유행만 만들어내고 가치나 의미가 없는 대중우상을 숭배한다.

 

또래지향성이 초래한 문화는 엄격한 의미에서 볼모의 문화다. 자기 문화는 재생산하지도 못하고 다음 세대에게 유용한 가치관을 전달하지도 못한다. 또래지향성이 증가하면 젊은이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도 감소한다. 그들에게 현재와 미래는 과거와는 전혀 연관 없는 진공상태에 존재한다. 정치적, 사회적 의사결정도 그런 무지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종족화가 되면 누군가와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즉시, 다른 사람들과 달라지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선택된 집단 내에서는 지극히 닮아가지만 집단 밖의 사람들과 불화는 적개심의 수준까지 강화된다. 종족문화들은 애초부터 이런 식으로 형성되어왔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전통적인 종족문화는 아래 세대로 전달되지만, 오늘날의 또래 종족들은 세대 간에 둘러쳐진 장벽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학교에서는 정신적 지주인 어른들과의 관계가 끊긴 미성숙한 아이들이 서로 어울리며, 대개 학년, 성별, 인종 등의 보다 뚜렷한 구분선을 따라 자동적으로 그룹을 형성한다. 이런 큰 그룹들 안에서 특정한 하위문화가 형성되고, 대부분은 대중매체에 의해 강화되고 구체화된다. 복장, 상징, 영화, 음악, 언어가 이런 하위문화를 지탱한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로서 교육자로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사회적 관용과 용인容忍, 에티켓을 가르치려고 투자한 시간을 아이들과의 애착을 긴밀히 하는데 투자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전통적인 애착 위계질서 안에서 양육된 아이들은 종족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우리가 심어주고 싶어 하는 사회적 가치관은 오로지 살아있는 애착관계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 많은 아이들이 인류의 영원한 문화유산의 기반인 보편적인 문화를 잃어버린 채 자라나고 있다. 아이들은 최신의 유행하는 것만 알고 또래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만 감상한다. 상호존중, 호기심, 공유된 인간 가치를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심리적인 성숙이 필요하다. 이런 성숙은 오로지 건강한 발달을 통해 이루어지며, 아이들이 이렇게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은 어른들뿐이다.

 

아이들은 또래에게서 가장 잘 배운다. 또래들이 어른보다 모방하기 쉽고 그만큼 아이들이 또래 지향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배우는 것은 생각하는 법, 개성의 중요성, 자연의 신비, 과학 비밀, 인간 존재의 의미, 역사의 교훈, 수학의 논리 같은 소중한 가치가 아니다. 또래처럼 입는 법, 또래처럼 행동하는 법, 또래처럼 보이는 법을 배울 뿐이다. 또래문화에서 최고의 가치는 초연함이다. 또래집단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아이는 상대가 당황할 정도로 냉정하고 초연한 태도를 띠고 두려움은 거의 혹은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 같고 툭하면 별거 아니야, 상관없어와 같은 말을 내뱉는다.

 

인간은 모든 동물들 가운데 가장 상처입기 쉬운 존재이다. 우리는 신체적으로 상처입기 쉬울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그렇게 상처입기 쉽고 예민한 아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정반대로 보일 수 있을까? 그들의 강인함, 무엇에도 상관 않는다는 듯한 초연한 태도와 행동은 진짜일까? 무엇에도 까딱 않을 것 같은 아이들의 초연함은 패거리와 어울리기 위한 위장수단이다. 방어는 그들이 취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 아이들 자체이다. 이런 태도로는 진정한 호기심을 키울 수도 없고 자유롭게 질문할 수도 없고, 배움에 대한 솔직한 열정을 표현할 수도 없다. 또한 감히 모험을 해보지도 않을뿐더러 삶에 대한 정열이나 창조성을 표출하지 않는다.

 

과거에 심하게 정서적 상처를 입었던 아이들은 앞으로 겪을 가능성이 있는 같은 경험에 무뎌지는 경향이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와 같은 정신적 외상을 입은 아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상처 입을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왜 그래야만 할까? 여기에서 우리는 취약성에 대한 방어와 거의 동의어인 취약성으로부터 도피의 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상처입기 쉬운 취약성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뇌의 본능적인 방어적 대응을 뜻한다. 상처입기 쉬운 느낌이 들게 만드는 사고와 감정을 스스로 차단하고, 정서적인 상처를 느끼는 인간의 감수성에 대한 의식이 약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누구나 때때로 그와 같은 정서적 폐쇄를 경험한다. 하지만 이런 폐쇄가 지속적인 상태가 되면 아이는 취약성에 대항해 스스로를 방어하게 된다.

 

또래지향적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경직되는 첫 번째 이유는 힘과 자신감의 원천을 잃어버렸고, 그와 동시에 견딜 수 없는 상처와 고통에 대한 방패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세계는 상처를 줄 수 있는 강력한 상호작용들과 사건들이 벌어지는 곳이다. 무시당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고 자기의견에 동의를 얻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대접을 받고 선택받지 못하고, 망신당하고 조롱당한다. 이런 모든 스트레스의 맹공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부모와 형성한 애착이다. 놀림을 당할 당시에는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나침반 방위 역할을 하면 그 영향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애착이 깊을수록 아이는 아버지의 말과 태도에 더욱 민감해진다. 만약 부모가 아이를 낮게 평가하고 모욕을 주고 경멸하면 아이는 망가지고 말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신체적으로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만큼 심리적인 면에서 상처를 입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다,

 

어른 지향적 아이가 부모와 선생과의 관계에서 더 상처입기 쉬운 것처럼,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또래들과의 관계에서 더 상처를 쉽게 받는다. 우리가 만약 아이들이 매일매일 견뎌야만 하는 사회적 상호작용들 즉, 끝없는 배신, 따돌림, 조롱, 불신 등을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겪어야 한다면 과연 얼마나 잘 지낼 수 있을까? 또래들이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면 아이들은 자신을 지켜주는 방패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의 취약성은 압도적인 공격을 받는다. 미국이 심리학자 줄리어스 시걸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전 세계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을 요약하면 아이들이 스트레스에 압도당하지 않게 지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카리스마 있는 어른의 존재라고 결론을 내렸다. 시걸 박사는 또 부모와 아이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애착의 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래가 아이에게 중심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사회적 책임감을 심어주는 교육프로그램으로 아이들에게 다른 아이과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설득하고 가르치려는 건 번지수를 잘못 짚은 일이다. 이런 식으로 또래 간의 따돌림과 배척과 모욕적인 의사소통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비현실적이다.

 

또래지향적 아이들이 받는 세 번째 타격은 아이가 취약성의 징후를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아이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칼 융은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을 공격한다고 설명했다. 취약성이 곧 적일 때는 그것이 어디에 있든 가장 친한 친구 안에 존재할지라도 공격하게 된다. 겁쟁이 혹은 애송이와 같은 말로 비아냥대고 눈물을 보이면 조롱의 대상이 된다. 호기심을 표현하면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거나 샌님 같다는 비웃음을 보낸다.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내면 끊임없는 놀림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그것을 보장할 수는 없다. 내일도 여전히 상대가 날 원하고 사랑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관계에서든 상실의 가능성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끼리는 서로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주려고 애쓴다. 우리는 정확히 또래 관계에서 결핍된 것, 즉 무조건적인 수용을 아이들에게 제공해야한다. 또래 관계에는 기댈 수 있는 성숙함도 의지할 수 있는 헌신도 다른 인간에 대한 책임감도 없다. 또래 관계가 만들어지지 못하면 어쩌지?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이런 불안감이 존재한다. 아이들은 누구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아이들은 실제로 친구를 잃기도 전에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정서적으로 얼어붙어버린다.

 

부모가 곁에 있어도 스트레스, 불안, 우울, 다른 일에의 몰입 때문에 정서적으로는 불안할 수도 있다.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건 단순히 부모가 같이 있어주는 게 아니라 정서적 접근이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많은 불안감을 경험한 아이는 주된 존재방식으로서 초연함을 채택한다. 부모가 아이와 제대로 애착을 형성했을 때, 부모의 사랑과 책임감은 아이들로 하여금 그런 절망적인 수단을 채택하지 않게끔 지켜준다. 아이들이 인간의 고통, 폭력, 죽음까지도 무감각해지는 현실에 대해 텔레비전이나 영화나 랩 음악으로 탓으로 돌리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근본적인 초연함은 내부로부터의 자극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은 오로지 우리 어른에게서만 비롯될 수 있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신의 느낌으로부터 도망가지도, 말초적인 것들에 의존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을 책임을 지고 있는 부모, 조부모, 교사들이다. 이런 어른들에게 애착을 단단히 형성한 아이일수록 취약성에 휘둘리지 않고 또래들과 제대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은 아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정서(情緖, emotion)는 다양한 감정, 생각, 행동과 관련된 정신 상태이다. 정서는 주관적 경험으로 대개 기분, 기질, 성격 등과 관련이 있다. 정서는 우리 삶의 방향을 정해주고 세계에 대해 해석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만약 우리가 볼 수 없거나 들을 수 없거나 맛을 볼 수 없거나, 신체적 고통을 느낄 수 없다면 얼마나 무력해질지 상상해 보라. 정서를 차단하는 것은 우리 감각기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부분이며, 더 나아가 우리 존재 자체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을 잃는 것이다. 정서는 삶을 가치 있고 재미있고 도전해볼만 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세계를 탐구하게 하고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성장의 연료가 되어준다. 또래지향성이 강요한 초연함이 아이들을 한계와 공포 속에 가둔다. 오늘날 그런 아이들 중 대다수가 우울증, 불안, 다른 장애들로 인해 치료받고 있다. 어른들이 사랑, 관심, 안전을 충분히 준다면 아이들은 그렇게 무감각해질 이유가 없다. 그런 안전성이 없으면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자라고 성숙할 수 있는 능력을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 취약성으로부터의 도피는 자아로부터의 도피다. 우리가 아이들의 손을 놓아버리면 결국 아이들은 가장 참된 자기 자아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