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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을 놓지 마라 (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 지음, 이승희 옮김)

왜 아이들은 반항 하는가?

아이의 애착이 우리를 도와주는 마지막 방법은 바로 부모에게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욕망이다. 아이가 못되게 구는 이유는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지만 부모가 요구하는 기준이 절망적일 정도로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아이의 욕망 자체가 없다면 부모이 기대가 현실적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양육을 위해서 애착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업적은 아이에게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욕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아이를 착하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아이의 내적인 특성을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의 착은 성격을 키우는 것은 아이의 어른에 대한 애착이다.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충동은 아이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 아이가 맺고 있는 관계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이가 나쁘다면 고쳐야 할 것은 아이가 아니라 관계다. 아이 버릇을 고치게 위해 아이를 고분고분하게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아이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죄책감이 들고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 잘못하면 아이는 깊은 불안감을 느끼고 상처받을 두려움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게 될지 모른다. 아이가 부모 대신 또래의 환심을 사려고 할 때 부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동기는 심각하게 떨어진다.

 

학습목표를 향한 노력, 우수함 추구, 사회에 대한 경의, 가능성의 인식, 재능의 발달, 열정 추구, 문화의 감상과 같은 부모의 가치들은 훨씬 즉흥적이고 단기적인 또래의 가치로 대체될 수 있다. 외모, 연예인, 또래에 대한 충성, 저급한 대중문화에 순응하기, 또래들과 잘 지내기가 교육이나. 개인의 가능성보다 더 높이 평가된다. 또래지향적인 아이에게 가치란 또래 집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부합해야 하는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아이의 욕망은 부모역할을 훨씬 수월하게 해주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이는 주의 깊은 보살핌과 믿음을 필요로 한다. 부모역할을 수월하게 만드는 최고의 투자는 그저 우리 아이가 좋은 아이가 되려는 욕망을 믿어주는 것이다. 그런 아이에 대한 믿음의 철회는 아이의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바람을 제거하는 셈이며 깊이 상처를 주는 일이다. 우리가 좋은 아이가 되려는 욕망을 소중히 여기고 키워주지 못한다면, 아이는 우리의 기대에 미치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할 동기를 잃게 된다.

 

일단 아이들이 또래 지향적으로 바뀌면 애착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우리는 부모로서 힘을 잃는다.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오토 랭크가 대항의지라고 하는 것은 강압적인 모든 것에 대한 본능적이고 자동적인 저항이다. 이것은 타인의 명령에 의해 지배당하고 억압당하는 느낌이 들 때마다 일어나며, 소위 미운 두 살이라 불리는 때에 가장 극적으로 등장한다. 대항의지는 보통 청년기에 격렬하게 재등장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활발하게 작용한다. 대항의지는 수동성, 꾸물거림, 혹은 기대와 반대 되는 행동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게으름이나 비자발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어른들이 종종 건방짐으로 받아들이는 부정성, 호전성, 혹은 따지기를 좋아하는 태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우리에게 중요한 일일수록 아이들에게는 하기 싫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채소를 먹으라고, 방을 치우라고, 숙제하라고, 언행을 조심하라고,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강요할수록 아이들은 더욱 말을 듣지 않는다.

 

강압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저항은 애착에 의해 완화된다. 우리와 친밀감을 원하는 아이는 우리 기대를 그에 부합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인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보여준다면, 아이는 훨씬 수월하게 부모의 미음에 들 수 있다. 그러나 애착역학에서 분리되면 부모의 기대는 압박의 원천이 된다. ‘무엇을 해라는 지시를 들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다. 아이는 친밀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또래 지향성은 아이의 부모와의 애착을 갉아먹음으로써 아이가 가르침을 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로 대항의지 본능을 드러내도록 만든다.

 

대항의지는 발달기능에 이중으로 작용한다. 일차적으로 아이의 애착반경 밖에 있는 사람들 즉, 낯선 사람들의 꾐에 빠지거나 억압당하지 않게 보호해준다. 대항의지는 또한 아이의 내적 의지와 자율성을 성장시킨다. 우리는 모두 의존적인 존재로 삶을 시작하지만, 자연적인 발달과정에 따라 자신의 참 의지를 가진 자발적이고 스스로를 통제하는 성숙한 존재가 된다. 부모의 기대와 요구를 차단함으로써 대항의지는 아이의 자발적 의지와 독립성을 만들어주는 도우미 역할을 한다. 따라서 대항의지는 모든 아이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상적인 인간역학이다. 우리는 아이가 고집이 세거나 의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의지라는 것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알고, 실패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향해 매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뭔가를 결정하면 부모가 안 된다고 얘기할 수 없을 때까지, 또 부모가 화가 치밀 때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이것은 의지가 아니라 집착이다. 진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통제하는 반면 집착은 무의식에서 비롯되어 개인을 지배한다. 아이의 반항은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의지의 부재를 뜻한다. 대항의지는 아이가 일으키는 일이 아니라 아이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대항의지는 대항하는 힘이기 때문에 우리의 결합하려는 욕망을 능가하는 뭔가를 아이에게 강요하려할 때마다 우리는 이 대항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셈이다.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아이가 독립하고자하는 건강한 충동에서 대항의지를 일으켰을 때이다. 아이는 스스로의 길을 찾기 위해, 자기 자신의 온전한 마음을 찾기 위해 지시를 거부한다. 그러나 참된 독립으로의 이행은 아이가 어른에 대한 애착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참된 독립성이 발달하고 성숙함이 이루어지면서 대항의지는 사라진다. 성숙한 인간은 복잡한 감정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독립을 원하면서도 애착관계를 유지하고자하는 상충하는 마음의 상태를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 결국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지에 대해 반사적으로 저항할 필요가 없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말이 맞으면 주의를 기울이고 아니면 그냥 자기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건강한 반항에는 진정한 독립이라는 목적이 있다. 대항의지가 어긋난 애착의 결과로서 드러날 때 아이가 애써 얻고자 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신이 되려는 자유가 아니라, 또래에게 자신을 맞추는 기회가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아이는 자기의 느낌과 의견이 또래들과 다를 경우 자기 느낌을 억압하고 자기 의견을 감춘다. 또래지향적인 십대는 자기 부모의 요구에 대해 무조건 화를 내거나 반항한다. 이런 왜곡된 형태의 대항의지를 건강한 십대의 자기주장으로 착각하는 어른들은 너무 일찍 부모역할에서 꽁무니를 빼곤 한다. 많은 부모들이 그저 쉽게 포기해 버린다. 분노 혹은 좌절감으로 그냥 물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조기 은퇴는 여전히 내면에서는 우리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아이를 유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그런 아이들이 또래들로부터 우리에게로 돌아오게끔 노력해야 한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의 요구가 지나칠 때마다 방어적으로 움츠려들거나, 자신들을 보호하는데 급급하다. 뒷걸음질 치고 거부하고 반대하고 외면한다. 부모 자신의 대항의지가 일어나면서 아이들과의 권력투쟁이 뒤따르고 이는 대항의지 간의 투쟁이 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이 그토록 필요로 하는 부모를 잃는다는 사실이다. 겁먹은 아이는 황급히 우리에게 화해와 관용을 구할 수 있다. 그러한 행동을 우린 바른 행동으로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항복은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분노와 위협으로 야기된 불안감 때문에 관계는 악화된다. 관계가 약해지면 부모대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기 쉬워지고 대부분 또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바위를 움직일 때나 아이를 움직일 때나 우리는 힘이 부족할 때면 본능적으로 지렛대를 찾는다. 주로 사용하는 방식은 대개 매수강압두 가지다. 애착은 자연적이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지렛대와 같은 수단은 인위적이고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다. 아이를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거나, 싫어하는 것 또한 불안함을 악용하여 무력을 사용하는 셈이다. 우리는 정당한 수단이 없을 때 이런 지렛대에 의존한다. 이런 방법은 웬만하면 쓰지 않는 편이 좋다. 이런 방법은 일시적으로 말을 듣게 할 수 있지만, 바람직한 행동이 고유한 인격의 일부가 되게끔 만들 수는 없다. ‘고맙다는 말이나 미안하다는 말하기, 다른 사람과 나누기, 선물을 하거나 카드보내기, 방 정리하기, 감사하기, 숙제하기, 피아노 연습하기 등의 모든 행동을 강압적으로 하게 만들면 자발적으로 하게 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다시 악순환이 시작된다. 부모 힘의 진정한 기반이 무너진다. 보상은 행동의 가능성을 높이기도 하지만 보상이 계속 주어질 때만 그렇다. 보상이 없어지면 게임을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