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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을 놓지 마라 (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 지음, 이승희 옮김)

부모가 밀려나는 이유

 

아이들은 애착을 형성하려는 유전적 충동으로 움직이지만, 그 대상이 꼭 부모나 교사여야 한다고 아이의 뇌에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뇌는 그저 방향을 정하고 애착을 형성하고 나침반 방위의 역할을 하는 사람과의 접촉을 지속하게끔 프로그램 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를 보살피는 일이 과소평가되고 있다. 보육기관에 대한 자금자원도 부족하다. 사실 아이와 관계없는 사람이 아이의 애착과 지향을 충분히 충족시켜주는 것은 힘들다. 보육시설이나 유치원을 거쳐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하루 대부분을 또래들과 어울리며, 어른의 중요성은 사라진 환경 속에서 보낸다. 안정적인 조부모, 삼촌, 고모들의 존재, 다세대 가족이 감싸주는 포옹은 이젠 극소수의 아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부모의 이혼은 아이들에게는 이중의 불운이다. 애착결핍을 불러올 뿐 아니라 경쟁관계의 애착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부모들과 충분한 애착을 형성한 아이들은 부모들이 서로 떨어져 있어도 양쪽 부모의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지만,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이혼을 감당하기 힘들어 한다. 양쪽 부모가 서로 아이의 애착을 놓고 겨룬다든지, 다른 편을 바람직하지 못한 인물로 매도한다든지 하는 경우 아이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한 사람과 가까워지려면 다른 한쪽 편과 어쩔 수 없이 분리되어야 한다. 어른들과의 정서적 접촉기회를 박탈당한 아이들은 또래들에게 향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부모 역시 아이를 보살피는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중 가장 쉬운 방법이 또래와의 상호작용을 권하는 것이다. 아직 해체되지 않은 핵가족들도 애착형성에 취약하다. 요즘은 부모가 모두 전업으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와중에서도 사회적 스트레스와 경제적 불안이 함께 증대하면서 자녀들과 결합된 차분한 부모노릇이 더욱 어려워졌다. 부모와 다른 어른들은 아이들과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한 애착을 형성해야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다. 현대의 많은 아버지들은 기꺼이 부모의 역할을 분담하려 하고 있지만, 스트레스와 만성적인 시간부족이 그들의 선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아이들의 애착형성은 많은 방해를 받고 있다. 또래지향성은 아이들의 공격성과 비행을 부채질하고 학생들을 다루기 힘들게 만들고, 건강하지 못한 생활방식을 선택하도록 선동함으로써 사회에 엄청난 비용을 부과한다.

 

이전의 한 세기에 일어났던 것보다 더 큰 변화가 10년만에 이루어졌다. 우리 문화가 적응할 수 있는 것보다 빠르게 환경이 변화하면 관습과 전통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문화가 어른-아이의 애착을 지원하는 전통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놀이는 사람과 사람을 특히 아이들과 어른들을 연결시키는 문화의 도구였다. 이제 놀이는 텔레비전을 마주보고 앉아 스포츠프로를 보거나 혼자 떨어져 컴퓨터로 즐기는 독자적인 활동이 되었다. 최근 들어 이루어진 가장 큰 변화는 의사소통의 과학기술이다. 우리는 의사소통의 기능일부가 애착을 촉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의사소통 기술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아이들의 손에 이런 기기들을 쥐어주고, 아이들은 이것을 당연히 또래들과 접촉하는데 사용한다. 아이들은 애착욕구가 강해지기 때문에 이런 접촉에 중독되기 쉽고 소통에 정신이 팔리게 된다.

 

6개월쯤 되면 아이들은 애착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거부감을 보인다. 이런 때에는 아이가 현재 애착을 맺고 있는 사람과 낯선 사람사이에 일종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엄마가 그 낯선 사람과 친근하게 접촉하고, 그것을 아이가 지켜보게만 하면 거부감은 줄어들고 아이는 그 낯선 사람과의 접촉을 받아들이게 된다. 새로운 애착이 기존의 관계에서 태어나면 그가 경쟁자가 될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고 부모와의 애착은 더욱 존중받게 된다. 부모가 궁극적인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판 방위로서 역할을 유지하고 부모와의 관계는 계속해서 우위를 점한다. 조부모, 확대 가족, 그리고 가족의 친구들과의 접촉은 또래들이 개입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부모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또래에 대한 애착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애착결핍을 견딜 수 없는 아이의 무력감에서 생겨난다. 전통적인 유대가 파괴되고 아이가 자연적인 나침반 방위를 상실했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한다. 그런 상황에서 뇌는 대체물 즉, 살아있는 애착 대상이 되어줄 누군가를 찾게끔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 새로운 애착이 현재 맺고 있는 관계에서 이어지지 않고 애착결핍의 상태에서 생겨나는 경우에는, 부모와의 애착과 경쟁하는 대상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애착은 대부분 결합에서 탄생되기보다는 단절에서 비롯된다. 부모들의 관심은 경제적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새로운 사회의 문화, 언어와 관습에 익숙하지 않기에 권위나 확신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방향을 정해주지 못한다. 그런 아이들이 유일하게 붙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이 또래들이다. 또래지향적인 문화에 발을 들여놓으면 가족은 곧 해체된다. 아이와 부모사이의 거리는 급격히 멀어진다. 이런 아이들의 부모는 위엄, , 지도권을 잃는다.

 

 

모든 아이는 애착을 통해 성숙하고 그 다음에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애착의 단계 없이 사회성으로 건너 뛸 수는 없다. 아이의 사회성 계발을 맹신하는 부모들은 너무 일찍 아이들을 자신의 품에서 떨어내려한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아이들이 상처받고 또래에게로 애착과 의존성을 옮기게 된다. 애착의 대상이 바뀌는 순간 부모의 권위와 힘도 사라진다.

 

부모역할에는 원래 힘의 보조가 따라야 한다. 부모로서의 힘이 빠진 상태에서 아이들을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수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 선배들은 지금의 부모들보다 훨씬 많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주의를 기울이게 할 때 우리의 조부모들은 강한 힘을 휘둘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우리 아이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는 정말 난감한 지경에 빠질 것이다. 부모의 힘이 사라지고 있다. 힘에 유혹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 위에서 힘으로 군림하려는 사람들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도 경험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힘은 그런 무력이 아니라 부모에게 자연적으로 부여된 권위를 말한다. 자연적인 권위는 강압이나 무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적절하게 조율된 아이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