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글을 올린다. 인서 독서지도를 하면서 인서를 보면 이 정도면 참 잘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인성도 올바르고 공부 지능도 뛰어난 편이다. 엄마를 어려워하면서도 엄마와의 애착 형성이 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 마음이 또래에게 가 있을 때 아이는 부모와 반대편이 선다. 부모와 닮은 것을 혐오하고 최대한 부모와 달라지고 싶어 한다. 누군가와의 친밀감을 추구하게 되면 그와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은 배척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아이들이 또래지향성을 띠게 되면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부모는 졸지에 경멸, 조롱, 멸시, 모욕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보다 어른을 따르지 않는다. 순진하지도 않다. 세상에 대해 감동하거나 자연과 세상의 경이로움을 탐구하는 열의도 부족한 것 같다. 많은 아이들이 지나치게 약았고 닳아빠졌으며, 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겉으로만 성숙하다.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가 없으면 쉽게 따분해 한다. 혼자서 하는 창조적인 놀이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요즘의 많은 부모들은 부모역할을 자연스럽게 느끼지 못한다. 가르칠게 너무 많은데 지식을 전달하는 능력은 웬일인지 감소되었다. 아이들이 자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끔 인도하는 능력이 부모에게는 없는 것만 같다. 아이들은 때때로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는 그리스신화의 세이렌의 노래에 홀려 우리 곁을 떠난 것처럼 생활하고 행동한다. 이 세상은 아이들이 살기엔 안전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했다. 아이들을 보호하기에 우리는 너무 무기력하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간청하거나 구워삶고, 매수하고 보상하거나 벌을 준다. 그러다 우리의 무력함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아이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물러서곤 한다. 이런 미봉책은 우리 시대의 풍조이며 매우 단순하고 권위적인 처방이다.
아이들이 진정으로 성숙했고 독립적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상을 확립하고, 인생의 확실한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많은 아이들이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많은 아이들이 자제심이 부족하고 소외되거나, 폭력에 의지하며 인터넷에 빠져 목표 없이 방황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몇 십년 전에 비해 적응하는 능력이나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기회가 적고 능력이 떨어진다.
아이를 양육하고 위로하고 인도하고 가르치는데 성공하려면 먼저 아이가 부모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부모의 권위를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는다. 양부모들은 종종 이런 사실에 직면한다. 위탁부모, 베이비시터, 보모, 보육시설 종사자, 교사 등 자기 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도 부모역할을 위한 맥락이 퇴색한다면 부모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부모 노릇하는 기술이나 아이에 대한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발달학자들은 이것을 ‘애착관계’라고 부른다. 한 아이가 어른에게 마음을 열고 부모역할을 허락하려면, 아이가 어른에게 능동적인 애착을 가지고 그 어른과 접촉하고 가까이 지내는 것을 원해야만 한다. 초기에 이런 애착욕구는 상당히 육체적이어서 아기는 말 그대로 부모에게 붙어있고 안겨 있어야만 한다. 순리대로라면 이런 애착은 정서적인 친밀함으로 진화해 가면서 마침내 심리적인 친밀함으로 발전된다. 이런 관계가 부족한 아이들에게 부모역할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 가르치는 일조차 힘들어진다. 애착관계만이 양육의 적절한 맥락을 제공해 준다.
즉 부모역할의 비밀은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는지가 아닌, 아이에게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에 있다. 아이가 부모와의 접촉과 친밀감을 원하면, 부모는 양육자로서 위안자로서 인도자로서 모범으로서 교사로서 혹은 코치로서의 모든 권한을 갖게 된다. 애착관계가 잘 맺어진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으로 모험으로 떠날 때의 베이스캠프이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은신처이고 영감의 원천이다. 아무리 뛰어난 양육기술도 이 애착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아이와 부모의 애착관계는 적어도 아이가 부모를 필요로 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변하지 않았다. 의존적이지 않은 것도 더 반항적인 것도 아니다. 변한 것은 아이들을 키우는 문화다. 우리는 부모에 대한 아이의 애착이 더 이상 문화적,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 초기에는 강력하고 충분했던 부모와 아이의 관계조차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훼손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 아버지, 교사 혹은 책임감 있는 어른들이 아닌, 자기 또래들의 지시와 모범과 지도를 따르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성숙의 단계로 인도할 수 없는 미성숙한 인간들의 가르침을 받는다.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양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또래지향성’이다. 또래지향성이란 무엇인가? 지향성이란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주변 환경에 익숙해지려는 충동으로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이자 욕구이다. 애착과 지향성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있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애착을 형성한 대상을 따름으로써 자동적으로 지향성을 설정한다. 아이들은 다른 항온동물의 새끼들처럼 지향본능을 타고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방향감각을 배워야 한다. 자식이 자동적으로 북극을 향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권위와 접촉하고, 따뜻함의 근원을 향하는 욕구를 지닌다. 아이들은 인생에서 그런 대상이 없다는 사실, 즉 내가 지향성 결핍이라고 부르는 이런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어른 동물이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듯이 부모 혹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는 어른이 바로 아이의 지향성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의 이런 지향본능은 새끼오리의 각인현상과 매우 유사하다. 새끼오리는 알에서 부화 되어 나오면 즉각 어미오리의 모습을 각인한다. 새끼는 성숙한 개체로 자라기까지 어미를 따라다니고 어미가 하는 행동과 명령에 따른다. 하지만 어미오리가 없을 경우 새끼오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움직이는 대상, 인간, 동물, 장난감을 따르기 시작한다. 이처럼 부모역할을 할 어른이 없을 경우 인간 아이도 가까이 있는 다른 누군가를 향하게 된다. 근래엔 또래 집단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아이들은 어른과 또래들을 동시에 지향할 수는 없다. 아이의 뇌는 부모의 가치와 또래의 가치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자동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아이들에게 또래 친구가 있어서는 안 된다거나 다른 아이들과 교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또래간의 교류는 자연스럽고 건강한 일이다. 어른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은 문화에서 아이들은 자기 개성을 유지하고 부모를 잘 따르면서도 또래들과 서로 교류하고 어울린다. 다만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래 사이의 유대가 어른들과의 관계를 대체하면서 아이들의 인생을 결정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어른들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을 자식들에게 전해줌으로써 중요한 문화전달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이 경험하는 문화는 부모가 아니라 또래들의 문화다. 그는 부모의 문화와는 매우 이질적인 자기들만의 문화를 스스로 생성하고 있다. 문화가 젊은 세대 내에서 수평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이런 문화는 새로운 세대로 내려울수록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이런 문화에서 아이들 문화가 득세하는 현상과 함께 청소년 범죄, 폭행, 왕따. 비행도 따라서 증가했다. 아이들 개개인의 발달도 비슷한 양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 심리학 관련 문헌들은 아이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또래 영항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아이들의 가치관 형성 과정에서 또래가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부모-자녀 관계에서 결핍 된 부분이 아이의 인격에 크나큰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다. 또래지향성이 두드러진 도심부 저소득층 거주지역에서도 자살률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놀랍게도 자살의 원인은 대개 또래의 거부나 왕따 때문에 일어난다는 연구보고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또래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그만큼 더 많은 아이들이 또래들이 무심히 내뱉는 말에,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함으로 인해, 또래들의 거부나 왕따로 인해 황폐화 되고 있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놔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들은 언젠가 우리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우리의 역할이 다 끝났을 때 아이들이 스스로 자립했을 때 놔주어야 한다. 미성숙한 또래에 자기 자신을 맞추는 것이 독립적이고 자존심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은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말라. 아이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이 선호에 따라 부모노릇을 하면 부모역할을 끝낼 시기가 오기도 전에 부모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수도 있다.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하려면 우리는 아이들의 잘못을 교정해야 하고 아이들의 애착욕구를 채워주어야 한다. 우리는 또래 지향성을 부추기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서 교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무엇보다 부모-자녀 관계를 본래의 자연상태로 되돌려야 한다. 아이와의 견고한 관계에 뿌리를 둔 부모는 본능적으로 부모역할을 한다. 아이들과 함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들을 위해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 안다면 자녀교육 노하우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본능적으로 아이들은 부모에게 속하길 원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양육자이자 멘토로서 본연의 역할을 되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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