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이 손을 놓지 마라 (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 지음, 이승희 옮김)

뒤틀린 애착, 파괴된 본능

 

우리 문화에서 또래지향성과 아이들이 어른에게 갖는 애착은 경쟁관계에 놓여 있다. 심리학의 영역에서 애착은 관계와 사회기능이 핵심이다. 인간에게 애착은 신체적, 행동적, 정서적, 심리적인 접근과 친밀함과 결합을 추구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애착은 절대적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들은 어른에게 의지해야 한다. 아기는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 만큼의 생존능력을 키울 때까지는 부모에 붙어있어야 한다. 이처럼 아이들은 자기 두발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에게 정서적으로 단단히 붙어있어야 한다.

 

애착과 마찬가지로 지향본능은 우리 본성이다. 지향의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형식은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것이 안 될 때 우린 초조해진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실제인지,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이 좋은 것인지,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스스로 방향을 정할 능력이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애착이 바로 그런 도움을 준다. 애착의 첫 임무는 아기가 붙어있던 사람에게 떨어져 지향해야 할 나침반 방위를 형성하는 것이다. 부모는 물론 그런 역할을 하는 모든 어른들은 아이에게 있어 최고의 나침반 방위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알다시피 애착은 변덕스럽다. 방향을 정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이 적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맡겨질 수도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의 방향으로 정해줄 자격이 있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방향조차 찾을 능력이 없다. 당연히 또래들은 우리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거나 방향성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옳다고 확신으로 가득 찬 그들을 보면 절망감이 느껴진다.

 

애착을 형성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각각의 방법은 우리 아이들의 행동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신체적인 접촉이다. 아이는 냄새나 시각, 소리나 촉각을 통해서 애착을 형성하고 있는 상대를 느낀다. 신체적인 접촉에 대한 갈망은 유아기에 시작되어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이런 기본적인 애착 양식에 의존한다. 잘 지냈어? 어디 갈까? 어디가 좋다고 하더라. 이런 이야기는 의사소통을 위한 대화가 아니다. 청각을 통한 접촉이라는 단순한 목적을 위한 애착의식일 뿐이다. 애착을 형성하는 두 번째 방법은 닮아지는 것이다. 이는 보통 걸음마 단계의 아이들에게서 잘 드러난다. 아이는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똑 같이 되고 싶어 한다. 아이는 모방과 경쟁을 통해 상대와 똑같이 존재하거나 표현하려고 한다. 이런 방식의 애착 형성은 언어를 습득하고 문화를 전달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닮아지는 것을 통한 애착 형성의 또 다른 방식은 동일시이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 사람 혹은 그 사물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실체는 부모일수도 어떤 영웅이나 단체일 수도 있다. 특정 배역, 스포츠인, 연예인, 사상, 혹은 누군가의 작품이 될 수도 있다. 극단적인 애국주의와 인종주의는 자기감각을 국가나 인종과 동일시하는 데 기초를 둔다. 의존적인 아이일수록 이와 같은 동일시는 더욱 강렬하다. 걸음마 단계의 아이는 자신이 애착을 느끼는 대상, 즉 엄마나 아빠, 혹은 곰돌이인형이나 유모에게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소유의 뒤를 따르는 것은 충성으로 애착 대상에게 충실하고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의 애착대상이 바뀌면 소속감과 충성심 또한 바뀐다. 친밀감과 접촉을 추구하는 네 번째 방법을 중요성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중요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애착을 중시하는 만 3-5세의 취학 전 아동은 상대를 기쁘게 하고 상대의 인정을 얻는데 몰두한다. 이 시기의 아이는 불쾌해 보이거나 비난하는 듯한 표정에 극도로 민감하다. 예민한 아이는 자신이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크게 좌절한다.

 

친밀감을 찾는 다섯 번째 방법은 느낌이다. 따뜻한 느낌, 애정이 깃든 느낌을 통해서이다. 부모와의 정서적 친밀감을 경험한 아이는 훨씬 많은 신체적 분리를 견딜 수 있고, 그러면서도 부모와의 친밀감을 유지한다. 자기의 마음을 주는 것은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친밀감을 추구할 때 아이는 자기 비밀을 공유하려 한다. 부모지향적인 아이들은 친밀감을 상실할까봐 부모와의 사이에 비밀을 두지 않으며, 또래지향적 아이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 상대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오해를 사거나 거절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는데도 여전히 자기를 좋아해주고, 받아들여주고, 자기 존재를 인정해줄 때 형성되는 친밀감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애착이 충분히 형성된 아이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도 친밀감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또래 지향적인 아이들은 극도로 제한적이고 표상적인 애착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은 애착을 형성할 때 가장 상처받지 않는 방법이고, 또래들과의 접촉을 추구하는 아이들이 대개 이런 방법을 선택한다. 따라서 아이들은 최대한 서로 같아지려고 한다.

 

주요애착들이 경쟁할 때 한쪽은 질 수밖에 없다. 아이는 또래 세계에 의해 방향을 정하거나 부모에 의해 방향을 정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뿐이다. 성숙한 어른들과 비교하면 아이들은 훨씬 심하게 애착 욕구에 휘둘린다. 자신의 진정한 개성을 희생하면서까지 또래들과 어울리고 같아지려는 강박적인 충동은 건강한 성숙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인간의 애착은 자력과 비슷하다. 자력은 양극화 되어 있다. 한 쪽 극은 나침반의 바늘을 끌어당기고 다른 쪽 극은 바늘을 밀어 낸다. 한 사람과의 친밀감을 추구하는 아이는 그 사람과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사람은 무조건 배척하려 한다. 주요 애착 대상이 바뀌면 그때까지 절친했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아무 가치 없는 대상을 변한다. 이런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도 있다. 애착에 중립은 없다. 애착이 아이를 지배하는 정도에 따라 관계는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너무도 흔하게 부모와 또래가 마치 연적戀敵처럼 경쟁관계에 놓인 애착대상이 되었다. 또래 지향적인 아이들은 부모와 닮은 것을 혐오하고 최대한 부모와 달라지고 싶어 한다. 같음은 친밀감을 의미하므로 다름을 추구한다는 것은 멀어지기 위한 방법이다. 진정한 자기 개성을 추구하는 아이는 순응을 요구하는 모든 압박에 대항해 자기만의 개성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매우 이기적인 아이들 대부분은 또래집단과 섞이는 일에 완전히 몰두해서 또래들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보이는 일에는 질색을 한다. 좋아하고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의 반대는 경멸과 멸시다. 아이들이 또래지향성을 띠게 되면 그 부모들은 경멸과 조롱, 모욕과 비방의 대상이 되곤 한다. 예수는 경쟁관계에 놓인 애착의 양립불가능성과 양극성을 파악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든 한 쪽을 귀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마태복음 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