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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무책임한 입방아

탄천을 걷는다. 겨울답게 눈도 내리고 매서운 칼바람 불고 추웠으면 좋겠는데, 포근하니 오히려 불안하다. 올해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아흔이 넘은 어머님은 전화를 하면 올해 아홉수니 조심하라고 걱정하신다. 세상이 하도 우수선 하고 불안하니 막연하게 두렵고 답답하고 쓸쓸하다. 아홉수라 그런가?
 
故 이선균 사건을 보면서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러한 사건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언제나 말이나 글로 먹고 사는 이들의 무책임한 입방아가 그 원인이다. 이런 사건을 볼 때마다 인간의 비열하고 잔인함이 두렵고 치가 떨린다.
 
1981년에 일어난 윤경화 살인사건은 71살 무속인 할머니 윤경화씨가 자택에서 자신의 수양딸과 가정부가 함께 피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조카며느리와 조카가 경찰에 신고했으나 경찰은 이를 재산을 노린 조카며느리 고숙종의 소행으로 의심하여 고문 등의 불법적인 수사를 했고, 고숙종의 자백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으로 밝혀져 무죄 판결을 받아 누명을 벗었다. 그러나 범인으로 몰렸던 고숙종은 영구적인 척추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보고 당시 박완서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 ...말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곡되고 전도되는 일의 책임이 글쟁이에겐 전혀 없는 것일까? 있다고 해도 두렵고, 없다고 하면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그것보다 더 두렵고도 역겨운 일은 스스로 알게 모르게 빠지는 말놀음이었다. 말놀음에 일단 빠지게 되면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곡되고 전도되는 효과까지 미리 계산하면서, 자신이 어떤 궂은 일로 부터도 안전을 꾀할 수 있게 될지 아닐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저녁에 고숙종 부인이 풀려나는 모습을 TV에서 봤다. 허리를 굽히고 엉덩이를 빼고 걷는 걸음걸이가 가슴 아팠다. 이런 경우 가슴 아프단 말은 또 얼마나 얄팍한 속임수인가. 사실은 통곡,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일이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정치가든 연예인이든 농사꾼이든 장사꾼이든 보험쟁이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적에 한결 같이 아름답다. 우린 이런 삶의 모습이 보호받을 집행할 기관도 만들었다. 그러나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고 우리는 다 똑같은 인권을 갖고 있다는 말이 한낱 떠도는 말에 지나지 않음을 어찌 고숙종 부인에게서만 왔다고 할 수 있으랴. 그 부인의 경우는 그 고난이 너무도 두드러져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준다는 것은 사실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그런 구원의 여지가 없는 지옥이 우리 삶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면, 그리고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일 수도 있다면.. 산다는 게 참으로 두렵다. 태양이 아무리 빛나도 세상은 비명을 지르고 싶게 깜깜해진다.
 
고숙종 사건의 경우는 말놀음이란 게 역겹다 못해 침 뱉고 싶어진다. 고부인이 입건되었을 때 세상의 입은 얼마나 떠들썩하고도 수다스러웠던가. 고부인이 설사 진범이었다 해도 다만 입건만 된 단계에서 그렇게까지 수다스러울 필요가 있었을까? 학벌, 허영심, 판잣집, 외모, 남편의 직업, 온갖 것을 다 긁어모아 그녀의 범행을 필연적인 걸로 증거했고, 함부로 분노했고 개탄했다. 입장을 바꿔서 미루어 짐작건대 그녀의 가족이 받은 고통도 그녀의 피의 사실보다는 이런 세상의 온갖 경박스러운 입방아가 아니었을까?
 
입으로 인권을 부르짖긴 쉽다. 인권을 짓밟은 짓을 매도하기도 쉽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입술에 침을 바르듯이 가볍게 인권이 어떻고 권리와 평등이 어떻고 부르짖길 좋아한다. 무슨 일만 났다하면 그런 소리는 한층 드높아진다. 그러나 자기 한 몸의 인권을 스스로 지키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러나 그녀가 입건됐을 때 그녀의 피의 사실만 가지고도 능히 그녀의 범행 사실을 완성시킨 입방아가 두 번 씩이나 그녀의 무죄가 선고되었고, 그녀의 처참하게 다친 육신을 눈으로 역력히 보고서도,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런 억울한 혐의를 쓰게 했나에 대해서는 점잖고 말 수가 적다. 그녀의 범행을 입증하기 위해 그녀의 성장과정, 숨은 허영심, 성격, 교우관계 심지어는 판잣집의 가난까지 낱낱이 파헤쳐서 들고 나온 입방아가 그녀에게 그런 끔찍한 피의 사실을 쓰게 한 보이지 않은 괴력에 대해선 일체 함구무언이다. 그 정체는커녕 꼬리조차 보여주려 들지 않는다.
 
그런 괴력에 의해 다친 게 고부인만의 우연이 아니라 그런 괴력이 도처에 충만해 있어, 법 없이 살 선량한 사람이라 한들 언제 어디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비슷한 대상이 될지 모른다 해도 그 괴력의 정체를 덮어둘 수 있는 것인가? 말이 역겨워 글쟁이인 것까지 부끄럽고 부끄러워 살맛 없는 와중에도 또 이렇게 말을 보태니 입이 있는 한 말을 해야 하는 팔자소관이 더욱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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