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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이반 일리치의 죽음

사진은 고호의 울고 있는 노인, 번뇌하는 노인? 입니다.
나는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 톨스토이다. 톨스토이는 맹렬하게 삶에 집중하며 성찰하는 삶을 살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환경 속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인생을 살았다. 러시아혁명 사상가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그는 ‘얼음이 깨지고 있다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더 빠르게 걸어가는 것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그 시대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거기에서 발휘해야 하는 불가피한 인간의 삶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삶을 비극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인식하지만 그 삶에 투신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야기 한다.
 
인간은 삶의 모순성 속에서 스스로를 완성시켜나가야 하는 존재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현실의 삶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향해 투쟁적인 삶을 살았다. 善을 추구하며 그 누구보다 실천하며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삶을 살았다. 톨스토이는 인생 자체도 열심히 살았지만 그보다 더 열심히 열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톨스토이 단편들은 탈무드나 이솝의 우화 같은 교훈적인 내용이 많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많이 추천한다. 톨스토이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우리 나이 때 인생을 한번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하는 책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다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정리하여 소개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생각과 문제의식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것을 극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보편적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철학적, 예술적 수준만큼은 다른 어느 작품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 작품의 서사구조는 아주 간단하다. 판사로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가 성공의 정점에서 갑자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간다. 서서히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에 대해 고통스럽게 되묻는다. 이런 사건구조만 보면 이 작품은 단순한 교훈의 나열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한 인간이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며, 그 의미를 파고드는 과정을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독자로 하여금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운명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감동적인 장면들을 담고 있다.
 
소설의 시작은 이반 일리치의 시선이 아니라 동료들과 가족 친지들의 시각에서 시작된다. 소설이 시작되면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동료들에게 통보되고, 그에 대한 동료 판사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동료들은 가까운 동료의 죽음에 대해 애도의 마음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한 보직 이동 등 자신의 이해득실을 계산하기 바쁘다. 이반 일리치는 시류에 민감하고 출세에 집착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비난 받을 정도로 속물이거나 부패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사회적 정도를 걷고자 노력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가 생각하는 삶이란 우아하고 고상하게품위를 유지하는 삶이다. 이반 일리치는 그런 삶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에게 결혼 역시 그런 삶의 수준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였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원하던 고위 판사보직을 얻어내고 가정생활도 안정에 도달하는 듯했다.
 
그러던 그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원인 모를 질병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불운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이 이반 일리치가 살아가는 실제 삶의 모습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이반 일리치의 삶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그의 죽음을 대하는 동료들과 아내, 게다가 의사들의 태도에서도 이반 일리치는 진정 인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거나 애도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하는 품위를 가진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저 이해관계 속의 한 존재에 불과하다. 아내와 딸 역시 자신들의 사치와 사회적 신분을 지켜주고 유지하게 해주는 존재로서만 이반 일리치를 받아들이고 있다.
 
다른 한편 이반 일리치가 죽음의 과정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인생을 새롭게 생각하는 것, 즉 성찰하는 삶의 양상이 또 다른 하나의 삶의 모습으로 독자에게 제시된다. 이반 일리치는 처음에는 자신이 ‘왜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가’를 거듭 물으며 神과 운명을 저주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남들보다 먼저 죽어야 할 이유가 없고 크게 잘못한 일도 없다. 더 비참한 것은 주변의 그 누구도 자신의 고통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하며 더욱 고통 속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결국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반 일리치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인생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의 문을 통과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아들을 불쌍히 여기며, 아내를 용서하는 마음이 들자 이내 그를 괴롭히던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고,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고통도 동시에 사라진다. 당대 러시아 사회의 일반적인 삶의 기준대로 살아온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이며, 용서와 사랑 속에서 인간적 삶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뒤에 이반 일리치는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톨스토이는 평생 끝없이 인생의 의미를 묻고 또 묻는다. 그의 작품들이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란 무엇이냐’라는 문제의식이었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도 죽음을 앞둔 한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되묻고, 작가 자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반추한다. 톨스토이가 매우 성찰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점은 그의 모든 작품에서 알 수 있다. 그는 대단히 몰입적인 삶을 살았다. 삶에 대해 회의나 망설임 없이 다시 말해 삶의 의미에 대해 되돌아볼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삶,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다른 한편 주어진 삶과 삶의 조건에 대해 끝없이 되묻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거듭 비판하고, 그 어떤 삶에도 정착하지 않으며 항상 어딘가로 떠나고자 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의 과정, 바로 그 공간에서 독자들을 자신의 삶과 죽음을 거듭 되돌아보며, 보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나갈 것을 이야기한다.
 
오늘날 우리는 삶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보다 살아가는 일 자체에 매몰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보통신과 문화혁명의 시대, 자본의 지배가 강화된 글로벌화시대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활동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고 구성하는 데에 필요한 일들과 처리해야 할 정보들과 기술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삶을 유지하고 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만이 중요하고, 그저 열심히 맹목적으로 삶에 투신하는 것만을 가장 뛰어난 삶으로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삶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 속에서 소비해야 할 하나의 소모품이 되었다. 엄청난 속도의 문명 속에서 우리의 삶 자체에 대해 거듭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 도구적 삶으로 전락해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성찰이 더욱 요구되지만, 인간은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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