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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인 본명은 영일英一이다. 한 송이 꽃이라는 뜻이다. 시위, 필화사건,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선동죄 등으로 체포와 투옥, 사형 및 무기징역 선고, 석방을 거듭하면서 시인은 1970년대 내내 박정희 정권과 맞섰다.
 
그러나 1991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이어진 학생들의 분신자살을 질타하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실었다. 이 일로 그는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민주화 운동 진영과 척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자신을 탄압했던 독재자의 무능하고 부패한 딸에 대한 옹호와 지지로 어처구니없이 훼손된 말년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쫓고 쫓기고, 맞고 때리는, 울고 신음하,는 비명을 지르는 소리의 중첩을 통해 지난 70년대의 공포와 고통을 날카롭게 드러낸 시다. 누군가는 그렇게 피를 흘리며 뒷골목으로 쫓겼고 누군가는 운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자정부터 신새벽 사이 뒷골목과 뒷골목 사이,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열망했던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이 시가 뜨거운 것은 잊혀져가는 민주주의를 노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했기에 더욱 뜨겁다.
오래가지 못한 아니, 언제나 잃어버린 민주주의를 타는 목마름으로 남몰래 기억하고 있는 한, 이 시는 여전히 뜨겁게 살아온다. 우리에게 늘 새롭게 되살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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