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나 한잔 들고가게!

애착 공동체를 만들자

어느 비 오는 날 관악산 연주암을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오르고 있다. 아마 아이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나도 손자와 함께 그러고 싶었지만 자식과 며느리, 할매까지 결사 반대이다.
 
은퇴 이후 아이들이 나의 친구였다.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아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다.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함께 지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의 사고와 어른의 사고가 같을 수 없으며, 좋아하는 것이 같을 수 없고, 일상이 같을 수 없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상, 취향, 사고가 다른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은 부모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요즘 아이들은 일찍부터 교육을 위해 어딘가에 누군가에게 맡겨진다. 일찍부터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길들여진다. 아무리 좋은 장난감도 함께 놀아주는 사람보다 못하다. 아이의 정서적 능력은 아이와 진심으로 놀아주는 누군가와 함께 할 때 학습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잠깐이고 건성이다. 예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숙모, 이모.. 모든 가족과 동네사람까지, 모두가 함께 육아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 나누었고 책임감을 느꼈다. 노인은 엄마, 아빠에게 육아의 스승이었다. 요즘의 젊은 부모는 최신정보에 의존한다. 육아의 스승은 구글이고 스마트폰이다. 앞으로는 더더욱 외부 전문가, 인공지능에 의존할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급변하고 있으니 할매, 할배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가정에서 그마다의 전통과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과 손자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보고, 수년 동안 지역아동센타 아이들에게 독서지도를 하며, 올 한 해 동안 초등학교 돌봄교실에서 아이들과 지내면서 느낀 점은 아이들이 지적으로는 우리 때보다 수준도 높아졌으며 빠르다는 것이고, 위험한 사회로부터 아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수준이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정서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물질에 대한 욕구는 없다. 부모들이 먼저 알아서 챙겨주니 원하는 것이 없다. 아니면 부모가 들어주지 않을 것들이기에 바라지도 않는다. 하고 싶은 것도, 물질적 욕구든 뭐든 욕망이 없다. 모든 것은 사회가, 부모가 원하는 것이고 주입한다.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본능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외롭고 미래는 벌써부터 막연하게 불안하다. 그래서 또래지향이 되기 쉽다.
 
자녀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와 나누는 대화는 한결 같다. ‘와서 밥 먹으라. 잘 시간이다. 장난감 치워, 숙제는 다했니?’ 아이는 자라서 학교를 간다. 그러나 삶의 의미, 사람으로서의 소명 혹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지 않거나 그런 대화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때가 되지 않았거나 앞으로 그럴 시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그럴 때를 놓치고 만다. 아이는 어른이 되니까. 부모가 자기 아이들과 중요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 자녀교육이란 자신을 교육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들은 아이 삶의 양식樣式이다. 우리 삶의 양식. 아니 우리 사회전체의 삶의 양식이다.
 
부모나 학교의 교사나 기타 어떤 교육기관에서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지혜로운 교육시스템을 개발하든, 아이들은 자기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는 생활양식을 따를 것이다. 아이는 물이고 우리 사회는 그 물을 담는 그릇이다. 물은 그릇모양에 따라 세모도 되고 네모도 되고 둥글게도 된다. 자녀교육은 부모의 세계관 아이와 부모 그리고 사회전체가 어떻게 사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병들고 불행한 사회는 불행한 아이들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어떤 부모를 만나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인간은 오랫동안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로 지낸다. 20년이상을 부모의 보살핌과 지원이 필요하다. 좋든 나쁘든 부모의 가치관과 성격에 영향을 받게 된다.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부모에게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다가 점점 커가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어떤 부모와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 40대 혹은 그 이상의 어른들 대부분은 애착마을이 현실로 존재했던 아동기를 회상할 수 있다. 그때는 이웃끼리 서로 알고 서로의 집을 방문했다. 부모의 친구들은 서로의 아이들에게 대부모역할을 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며 거리에서 놀았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그런 애착 마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문화를 지탱했던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사라졌다. 우리들 대부분은 아이들을 가르는 일을 우리도 아이들도 이전에는 만나보지 못했던 어른들과 나누어야 한다. 아이들은 애착을 형성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진정으로 보금자리에 있는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 아이들에게 관심을 표하는 어른 친구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진작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한 아이들과 확대가족을 결합시키는 관습과 전통을 창출하는 일을 장려해야 한다. 가볍게 연결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조부모들이 애착서열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할배, 할매들이 손자들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하고 있다. 요즘은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린다.
 
생활 속에서 아이를 돌보는 어른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는 또래지향성에 대해 그만큼 강한 면역력을 갖추게 된다. 우리는 아이들을 어른들과 결합시키는 공동체 활동에 가능한 한 많이 아이들과 함께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종교나 민족과 관련된 시설이든 스포츠 활동이든 문화행사든 혹은 일반적인 지역사회이든 상관없다. 모든 부모들에게 조력자가 필요하며 가족 등의 자연적인 조력자가 적다면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돌봄터나 유치원, 학원을 구할 때도 그들이 필요한 교육과정을 거쳤다거나 전문성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이가 나침반의 방위로서 부모의 대리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보금자리에 있는 듯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관계는 잘 준비되고 계발되어야 한다.
 
요즘엔 양부모 중 한쪽만 아이를 키우는 가족도 있지만, 양쪽 부모 모두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우리를 대신할 수 있는 어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제대로 된 어른과의 애착은 청년기에 특히 중요하다. 성숙의 과정에 있는 청소년들이 늘 그렇듯이 부모로부터 멀어질 때, 기댈 수 있는 부모를 대신할 어른이 있다면 또래들에게로 돌아서지 않게 지켜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능을 할 수 있으려면 아이가 청년기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관계를 닦아놓아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아이들과의 애착관계를 형성하여 부모를 추방하지 않고, 또래들을 포함시킬 수 있는 애착마을을 만들어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게 해야 한다. 아동기는 미성숙함이 작동하는 시기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동기의 기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부모 역할은 관계의 문제이며 아이가 부모와 제대로 애착을 형성했을 때에만 제대로 수행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부모노릇을 하는 기간은 급속하게 짧아지고 있다. 여기에 또래지향성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애착이 빗나가면 우리는 부모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아동기가 끝나기도 전에 부모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재앙이다. 누가 우리 아이들을 기를 것인가? 영원불멸의 대답은 ‘부모가 아이들의 멘토요, 안내자요, 양육자요, 표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그 임무가 완성될 때까지 아이들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이기적 목적이 아니라 아이들이 마음껏 발전할 수 있게 하기위해서, 아이들을 제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연적인 발달을 성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아이들의 손을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 (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의 ’아이의 손을 놓지 마라’에서 이 글은 제가 임의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
 
 
 

 

'차나 한잔 들고가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詩를 읽는가?  (1) 2024.01.30
무책임한 입방아  (1) 2024.01.30
이반 일리치의 죽음  (1) 2023.12.17
가을 상념  (0) 2023.11.06
프로파간다 propaganda  (1) 202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