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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법과 이데올로기

돌아보면 지난 세월을 치열하게 살지 못하고 허송세월로 살았다는 자책감이 있다. 데모가 일상적이었던 70년대 대학교를 다녔지만 당시 나는 그런 사회적 상황을 듣고 보면서 외면했다. 그러나 그런 사회의 횡포에 맞서는 자들 때문에 나는 지금 이 호강스러운 고민을 한다. 김수영의 詩 ‘폭포’ ‘풀’을 읽을 때면 더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딸 책상을 정리하다 고등학교 때 공부한 단편소설을 읽다 감명 깊게 읽은 것이 박완서의 ‘조그만 체험기’와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이다. 요즘 시국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라 소개한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분노를 책을 덮는 순간 잊어버리고 살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는 한 사람의 권력자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무리 허울 좋은 법과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위선을 포장할지라도 그 허구를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허구를 읽어낼 뿐만 아니라 그 껍데기를 벗기고 이 땅의 정의를 위하여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정상적인 권력을 방관하여 결국 그들을 돕는 걸과를 낳는 것도 우리네 사람이지만, 폭력과 비리와 모순으로 얼룩진 사회를 바로 잡는 것도 우리네 사람들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느끼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수영의 시 ‘폭포’ 한 구절을 읊는다.
‘곧은 소리는 소리다. 곧은 소리는 소리를 부른다’
이 땅은 곧은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곧은 소리를 불러 모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 ‘법 없이 살 수 있을 사람’이란 말은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을 의미한다기보다, 법이라면 달라는 것 없이 두렵고 싫어서 자기 양심에 걸리는 일과 법에 걸리는 일을 동일시하며, 조심조심 살아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법의 그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걸 피할 수 있는 법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건 실제로 죄가 있고 없고 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총이 결코 총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며, 칼이 결코 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없듯이, 법이 결코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의 편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깨달음이 왔다. 뭔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았고 남편은 쉬이 풀려날 것 같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미칠 것 같았다. 억울하다는 느낌이 목구멍까지 차니까 울음도 안 나왔다. ...” ( 박완서 ‘조그만 체험기’)
 
“고삐는 여러분 손에 쥐어져 있다.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 고삐를 당겨 여러분 스스로를 제어해 주기 바란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여러분 스스로가 내 손에 그 고삐를 쥐어주는 일이다. 나는 ‘자율’이라는 낱말을 좋아한다. 담임선생님은 자율이라는 낱말로 요술을 부려 우리들을 묶고 있었다. 자율이라는 낱말로 우리를 묶으면서도 실상 우리들 머리 위에 군왕처럼 군림하고 싶은 것이다. ..”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박완서 ‘조그만 체험기’는 평범한 가정에서 일상이 깨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당사자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정직하고 성실한 남편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 남편을 의지하고 사는 아주머니는 세상물정을 알 필요를 느끼지 않는 전형적인 주부였다. 그랬던 그녀에게 남편이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구치소에 넘겨지는 일이 닥쳤다. 그리고 그때까지 세상 돌아가는 법칙을 알 필요도 없었던 아주머니의 당혹스러움과 작은 분노, 억울함이 이어진다. 돈이 법보다 우선인 사회, 관료들의 군림하는 모습, 있는 자와 없는 자들의 차별이 가장 뚜렷한 구치소 뒤켠의 일을 겪은 것이다. 남편이 재판을 받고 풀려난 후 그들 부부는 다시 일상 속에 묻혀 전과 다름없이 살아간다.
 
법은 사회에 질서를 부여한다. 사회구성원에게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지시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경우 강제를 동원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이 이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평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교육을 받을 권리, 선거할 수 있는 권리,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 일할 수 있는 권리에서 나라를 지킬 의무, 세금을 낼 의무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리와 의무는 법 앞에서 평등하다. 법이 주는 평등에 대한 신념은 사회구성원들에게 각자는 서로에게 존중되어야 할 존재임을 믿게 한다. 따라서 법이 지닌 구속력도 이러한 평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구성원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머니네 식구들도 그러한 법의 테두리 속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믿고 산다.
 
반면 이데올로기는 사회에 목표를 부여한다. 어떤 집단이든 그 집단이 추구하는 공통의 가치나 이념이 존재하게 마련인데, 우리는 그것을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이를테면 자유민주주의나 반공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들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오로지 지배자만의 개념으로 해석된다. 이데올로기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신념이나 가치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각인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심코 뱉은 ‘무슨 여자가 이리 기가 세냐?’는 말 속에는 여자는 얌전하고 조신해야 한다. 내지는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좋다는 남성위주의 이데올로기가 점재해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이런 힘 때문에 공통의 이데올로기를 갖는 집단에겐 자유나 자율이 주어져도 그것은 대단한 구속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통의 가치나 목표를 부여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박완서의 ‘조그만 체험기’에서 아주머니가 억울함을 느낀 까닭은 바로 법의 평등하지 못한 처사에 있다. 아주머니를 비롯한 많은 서민들이 이러한 차등을 아니, 이러한 차별을 법을 통해 절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경찰서에 붙들려 갔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빽을 떠올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계속해서 맞이 했다. 검찰지청 정문을 통과하는 데도 수위에게 돈을 주어야 했고, 대기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몇 푼이 돈이 더 필요했으며, 남편의 무죄를 증명하는 데는 ‘집 한 채’ 날릴 각오를 해야 했다. 남편을 면회할 때도 구치소 한켠에서 특별면회의 특전을 씁쓸히 물리쳐야 했고, 무엇보다도 그녀보다 더 돈 없고 빽 없는 자들의 수모를 맥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 사회가 보장한다는 '법 앞에서의 평등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법은 법적이지 못한 절차와 방법으로 집행되고 있었다. 공정하고 청렴해야 할 관료들은 법을 미끼로 서민들의 돈을 후려내었고, 탈법행위를 남발하면서도 그들이 누리는 권력으로 법이 미치는 범위 밖에서 안전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보다 더 억울한 수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라도 그녀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아주머니의 조그만 체험을 통해 보이는 우리 사회의 단면은 이런 것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창출한 자들에게는 권력을 유지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이지만, 그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절대적 진리가 되어버린다. 이쯤 되면 권력자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손쉽게 대중을 조정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법과 이데올로기는 권력의 또 다른 이름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그렇게 덧칠해진 권력 속에 뒤틀려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통치자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지며 법이 권력자에게 굴종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권력이 휘두르는 횡포에 우리 사회는 뒤뚱거려야 했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교묘한 이데올로기에 그 이면을 보지 못한 채 휩쓸려 가기도 했다. 소설 속 아주머니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목청껏 외칠 만큼 용기도 없고, 사회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의지를 곧추세우고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는 소시민들이다. 아주머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후 감옥 속 사람들의 억울함보다는 자신의 하루하루를 더 많이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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