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아주 사소한 것에 매달려 그 순간 그것이 세상 모든 것인 것처럼 죽네 사네 고민하고 힘들어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세상 일 모든 것들이 장난 같고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모든 것들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것도 깨달음인가? 산다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다는 깨달음.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인가? 깨달음이란 지금까지의 삶, 사고에서 벗어나 그것들을 무화無化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해탈解脫이니 초월이니 하는 깨달음은 공부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결국 변화를 위한 새로운 시작 아닌가? 열심히 젖병을 빨면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손자를 보면 남은 여생餘生이라도 함부로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릅니다. 특히 부당한 권력이나 힘의 압력을 받게 되면 사람들의 행동방식은 가치관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그 힘의 노예가 되어 정의나 양심 같은 것들을 쉽게 내던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며 적당하게 살아갈 궁리만 하기도 합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직 자기 양심의 명령만을 따르면서 그것과 배치되는 힘과 당당히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누구 인정해주지도 않는 암울하기만 한 너무 외롭고 험난한 길입니다. 이런 외롭고 그 험난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왔던 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독서지도 수업 내용에 해마다 학년마다 시詩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는 중고생들 국어참고서를 구해 시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그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 책 표지 날개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한용운)
...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한 동안 심한 배신감과 허탈함에 빠졌던 적이 있다. 그 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와 상식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심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서정주를 비롯해 우리가 교과서에서 만나왔던 시인, 소설가들이 일제시대에 친일파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주요한, 이광수, 최남선, 이효석, 박종화, 유진오, 김동인, 모윤숙... 그들은 하나 같이 나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문학을 공부했고 또다시 이 작품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심한 회의감으로 몰아넣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라면 그 시대에 당당할 수 있었겠느냐고, 목에 칼을 들이대는 상황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사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느냐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문학사의 이육사, 윤동주 그리고 한용운 처럼 맞서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면, 적어도 붓을 꺾고 침묵이라도 했어야 옳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육사나 윤동주 같은 시인들의 높고 투명한 정신으로 빚어 쓴 시들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광야廣野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수많은 문학인들이 변절하여 일제에 아부하고 아첨하는 시를 쓸 때도 동주와 육사만큼은 흔들림 없는 민족의 양심으로 그들의 문학을 부끄럼 없이 지켜왔던 것이다. 육사의 시는 우리에게 뭉클한 감동을 장엄한 목소리로 전해 준다. 이육사는 역사의 암흑기였던 일제 강점기 속에서 그의 삶을 온통 독립투쟁에 내던져 역사의 아픔을 함께 한 시인이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고 40세 짧은 인생을 북경의 감옥에서 쓸쓸하게 마감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1935년 1941년까지의 기간 중에 쓰여 졌다. 그가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독립투쟁을 하던 때였으므로, 그의 시에는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 북방의 분위기와 강렬한 저항의지가 장엄한 가락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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