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나도 죽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내 인생 혹한기는 스물두살 군대에 있으면서 맞았던 1980년 겨울이 아니었나 싶다. 학생과 조직폭력배를 너무 많이 잡아들인 탓에 구치소 수용 공간이 모자라게 되자 전두환 일당은 병역미필 남자들을 감옥 대신 군대에 보내게로 한 것이다.  1981년 새해 첫날을 나는 서울 서빙고동에 있던 국군보안사 대공분실에서 맞았다. 낮에 철책선 초소에서 대공근무를 서다가 영문도 모른채 그곳으로 끌려갔다.  발도 동상으로 엉망이었고 몸은 옴이 잔뜩 올라 있었다. 국군 통합병원 의사가 말했다. ‘가벼운 신체접촉만 해도 재수가 없으면 옴이 옮겨 붙을 수 있다고 직원들에게 경고해 주었어요’   그후 반경 1미터안에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신군부가 강압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신문방송으로 하여금 인간 전두환과 헌법 개정안을 찬양하게 했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압도적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그때 나를 붙잡아준 것은 희망이나 용기가 아니었다. 억울함과 분노, 복수심이었다.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삶이 죽음보다 좋은 건 아니다.  삶이 견디기 힘들어서 또는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숱하게 많았다.

 

대한민국 국민 여섯 가운데 하나가 1년에 한번쯤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60대는 넷중 하나, 70세가 넘는 노인들 셋중 하나는 그렇다.  자살을 생각한 사람의 다섯 가운데 하나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은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철학적 실존적 선택이다.  청소년의 자살 충동은 대부분 성적과 진학문제로 인한 열등감과 번민에서 비롯된다.  인생을 잘 살려면 평생 공부해야 한다.  공부는 사람에 따라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고, 하고 싶은 직업이 될 수도 있다. 극복할 수 있는 시련과 고통, 스트레스는 해롭지 않다.  사람을 단련한다.  그러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시련은 아이들을 죽인다. 중장년에게는 경제적 실폐가 자살 충동의 진앙이 된다. 가난은 그저 돈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직, 고금리 사채, 일하고 또 일을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 사업, 실패.. 이런 것들이 때로 마지막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동물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면 최후까지 버티다 굶어죽는다.  고령이 접어들면 질병이 자살 충동을 불러들인다. 혹독한 질병에 걸리면 삶은 전쟁이 된다. 질병가 싸워 살아남는 것 자체가 삶이 되고 더욱이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거나, 이겨도 단지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살은 단순한 충동 표출이 아니다. 실제로는 죽음이 직접 동반하는 것보다 더 혹심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은 끝에 자살을 감해한다.  학업 성적, 경제적 궁핍, 질병의 고통, 가족간의 불화, 명에 실추, 타인의 비난, 풀길 없는 억울함.. 그 동기가 무엇이든 다르지 않다.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자살은 탈출구가 된다.  세상도 인생도 다 굴곡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평화로운 번영의 시대가 있는가하면 전쟁의 시대도 있다.

 

국민 경제에도 호경기와 불경기가 있는 것처럼 개인의 삶에도 내리막과 오르막이 있다. 사업은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우울증을 부르는 사회적, 개인적 생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 성적부진이나 실직과 같이 우울증을 부르는 심각한 부정적 스트레스는 대부분 제도와 관습,  문화 등 시회적 원인이 있다. 여기에 기정불화나 실연같은 개인적 문제와 관련된 스트레스가 겹치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주는 제도와 관습, 문화는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들 각자는사회적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생활 사건이 주는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공부의 출발은호기심이지만, 그 과정은 의심이다.  타인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 나만의 비법은 거리감이다. 세상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나는 좋은 세상을 원하지만 그 세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내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경우에도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는 일들은 의미가 있다고 믿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뿐임을 인정한다. 이렇게 하면 좌절감, 폐배 의식, 상실감, 절망감, 외로움,  자기바하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내 삶에 대한 평가는 살아있는 동안만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먼 훗날 또는 긴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 스스로 의미를 느낄수 있는 활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 좋다. 그러니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자.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대한민국 수출액이 10억달러를 돌파했다. 요즘은 6백배 많이 수출한다. 수출기업 사장은 애국자로 칭송 받았고, 양담배를 피우고 외제차를 타면 메국노로 지탄 받았다.  수출 제일주의와 더불어 박정희독재의 이념적인 기둥이 된 것은 반공주의였다.

 

나는 유물론이 공부할 가치가 있는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유물론은 인간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정신과는 무관하게 물질세계가 존재하며,  정신 역시 물질이 운동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유물론은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는데 다른 철학 못지않게 유익하다. 죽음은 곧 세포의 소멸이다. 인간은 약 100조개의 세포를 가진 다세포 생물이다. 대뇌와 소뇌 활동이 모두 정지되면 의식이 없어진다. 다세포 생물의 죽음은 몸을 이루는 세포 전체가 유기적으로 협력해 생명활동이 끝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인간은 단순한 다세포 생물이 아니다. 정신 또는 지성을 가진 특별한 종이다. 모든 개인은 나름의 자아 정체성을 지닌 삶의 주체이다.  자아 정체성을 상실한 중증 치매 환자의 경우처럼 철학적으로 사망하였지만, 생물학적 의학적 법률적으로는 살아잇는 사람도 있다.

 

세상사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추론하고 계산하는 일은 두뇌가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목적에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은 심장의 몫이다. 심장이 멈추면 사람은 몇분 안에 죽는다. 심장은 느끼거나 생각하지 못한다. 차가운 계산도 뜨거운 헌신도 모두 두뇌가 하는 일이다. 이성도 마음도 모두 거기에 있다. 사람의 뇌는 거대한 신경망 덩어리다.  세포의 생태계 또는 작은 우주라고 해도 무방하다.  뇌세포의 교체 주기는 인체의 모든 세포중에 가장 길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든 신체활동과 정신활동을 이 세포덩어리가 관장한다. 인간 정신은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인 뇌세포 활동의 산물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무엇인가?  (0) 2019.12.19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  (0) 2019.12.16
남자의 마흔살  (0) 2019.12.12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0) 2019.12.11
내 인생은 나의 것  (0) 2019.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