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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나는 심오한 인생론을 펼친 위대한 고전보다 쉽게 읽히고 재미있고 감동을 주는 책이 좋다.  열등감은 삶의 기쁨을 갉아먹는 부정적인 감정 중에서도 단연 고약한 것이다. 열등감에 깊이 빠지면 자기 자신을 비천한 존재로 느끼게 된다.  크러잉넛 멤버들은 자기네가 좋아하는 펑크록을 평생 올라야 할 나무로 선택했다. 다른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각자 자기의 나무를 골라 오르면 된다. 사형집행 일과 집행방법만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살아있는 인간은 모두 사형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잘 사는 것 뿐만 아니라 잘 죽는 문제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하겠기에 실존주의는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삶은 곧 죽음이다. 시간이 희소성을 잃으면 삶도 의미를 상실한다. 삶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죽고 싶어질지 모른다. 너무나 간절하게 영생을 원한 나머지, 그것을 구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유한한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환희와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새 날이 밝으면 한 걸음 더 죽음에 다가선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도 때로 그것을 잊는다. 오늘의 삶을 누구나를 향한 미움과 원한으로 채운다. 이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루어 둔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지 않는다. 운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대쯤에야 비로소 자신이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허무하게 깨닫는다. 때로는 자살이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와 존엄을 찾는 수단이 되며,  삶의 의미를 완성하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구한 말 지식인 매천 황현의 자결,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노무현 대통령의투신이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던진 질문이다.  생명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부모에게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재능을 안고 태어날지 누구도 선택할 수 없다. 사람은 모두 던져진 존재로 이 새상에 온다. 먼저 태어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존재와 삶의 환경을 인식한다.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는 물었다.  그냥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아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누구도 타인에게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대신 결정해 줄 수는 없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인생의 품격과 성패를 결정짓는 중대사이다.  세상은 냉횩하고 발딛는 곳마다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무도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늙고 병드는 것도 막지 못한다. 우리는 늘 부딪치고 누군가에게 상처받는다. 남들은 잘 해나가는데 나만 헤매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리 상처를 받아도 다시 일어나 스스로를 치유한다. 요즘은 책도 신문방송도 힐링이 대세다. 청년은 아기가 아니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상처를 입어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타인의 위로를 받아 성처를 치유할 수 있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타인의 위로는 자신의 힐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취업난은 청년들 자신만의 책임이 아니다. 국가와 사회가 문제다 그렇게 위로를 받으면 열패감은 덜어진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자기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문제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부당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악과 개인적 악덕은 연관되어 있지만, 둘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의 목표와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엄한 개인의 고유한 권리지만, 그 자유의지를 발현하는 데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려고 노력해야 마땅한 이성의 원리 또는 도덕법이 있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카뮈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지금 바로 여기서 그렇게 살고 싶다. 카뮈는 세상과 삶 그 자체가 부조리라고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사형수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살아가려면 체념하지 말고 반항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있는 힘을 다해 살라는 것이다. 카뮈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했고,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놀이와 사랑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은 사랑, 일, 놀이다. 이 셋을 채우며 여기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다는 이야기다. 연대란 동일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 누군가와 손잡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삼아 어디엔가 한께 속해 있다는 느낌을 나누면서 서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알베르 카뮈의 인생을 생각하며 자문해본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은 내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는 어떤 놀이에서 즐거움을 얻고 살았으며, 어떤 놀이를 더 하고 싶은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며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가?  무엇보다 먼저 내가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 그 일이란 배우고 깨닫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작업이다. 나는 또한 세상속에서 사람들과 더 넓게 연대하면서 살고 싶다. 의무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내가 기꺼이 하고 싶고 내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하고 싶다.  나는 예전에 나의 모든 행위가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를 것으로 규정 당하고 해석되는 한,  떳떳하고 기쁜 마음으로 사회적 연대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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