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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내 인생은 나의 것

청년기의 핵심 과제는평생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학시절 정치학 강의에는 한국정치가 없었고, 경제학 강의에는 한국 경제가 없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대학 강의실에는 비판적 지성이 자라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강의를 듣느니 혼자 책을 읽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때 내 문제는 꼭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나는 판검사가 되겠다는 모범답안 말하곤 했다. 나는 공부가 좋았다.  중학생 때는 축구와 핸드볼 추리소설에 빠졌다.  국어와 고문을 베우면서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육사 선생과 만해선생의 시를 낭송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작문시험에 대비하려고 읽은 문학평론이나 논설문이 재미있었다. 나는 대입 본고사 국어 작문시험에서 작문 주제가 '내가 사랑하는 생활'이었다.  나는 그때 평범한 삶이 아름답다는는 말로 마무리 했고, 좋은 점수를 받았다.

 

인생의 품격은 평범하거나 비범함과 상관없는 것이다.  내 문제는 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무엇인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었다. 나는 목표도 방향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았다. 눈앞에 닥쳐온 일을 나름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다. 야학교사가 되어 또래 여성노동자들의 학습들 도왔다.  반정부 시위를 하다가 잡혀가고 징역을 살았다. 청춘을 그렇게 아무 흔적 남기지 않고 보냈다. 그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원한 삶의 방식은 아니었다. 만약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계속해서 살면 좋겠다고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훌륭한 인생이다. 지금처럼 살 수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 바꾸어야 한다.  성인 된 후 오랫동안 내 삶을 지배한 감정은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었다. 수치심과 분노, 연민, 죄책감,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나는 판검사가 되는 것이 목표였지만 내가 본 판검사는 박정희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선을 실현하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는 법률가도 필요하다. 의사, 공무원,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박사학위나 전문직 면허를 취득해 제도 안에 참여하면서 훌륭한 삶을 살수도 있다. 그렇게 하려면 기득권과 더불어 살면서도 그 달콤함과 안일함에 젖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악에 가담하지 않고 살려면 내면의 힘이 있어야 한다. 한창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을 때 대한민국 언론은 이미 정부 탄압에 굴복했거나 자발적으로 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독재정권의 부패와 인권유린을 아무리 비판해도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독재자 밑에서 공무원을 하거나 독재자를 찬양하면서 돈을 가져다 바치고,  그 대가로 특권을 받는 재벌의 일꾼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좋지 않은 일을 해야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닥치는 대로 산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세상은 제 갈길을 가고 사람들은 또 저마다 자기 삶을 살 뿐이다. 세상이 다른 사람의 내 생각과 소망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세상을 비난하고 남을 원망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평생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돈을 버는 데 골몰하는 사람, 일만 하는 사람, 권력을 쫓는 사람, 신을 섬기는 사람 등 백 사람이 있으면 백가지 삶이 있다.

 

지금부터라도 내 삶에 대해 더 큰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싶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의미와 기쁨을 느끼고 싶다.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늦었지만 내 마음이 가는대로 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나는 나를 위해,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인생은 훌륭할 수 없다는 관념에 눌려서 산 것만은 사실이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마다 누구에겐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앗다.  내가 괴로워한다고 해서 누군가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그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떳떳하게 그 권리를 행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