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앞날이 막막해 보이고, 어디에서 시작 되었는 모를 불안감이 피어오르고 닥친 일이 감당하기 어렵고, 하소연하거나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을 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나는 운동movement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정치운동까지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때가 없었다. 하고 싶다는 욕망보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이끌려 사는 인생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나들이를 가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까지 하고 싶다기보다는 해야 한다는 셍각이 더 컸다. 정당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당장 들어줄 능력이 없는 요구와는 싸울 수가 없다. 정당한 요구인데도 다 들어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괴로웠다. 정치를 하면서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과 마주쳤던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타인의 자비에 기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종 흔들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환경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거부할 때가 있고 다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생물학자 찰스 도킨스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서 사람까지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생물은 유전자가 만든 생존기계라고 주장했다. 유전자 또는 본능이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전부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사람은 환경 지배를 받는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성격이나 인생관 행동양식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해서 다 바꿀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산층 출신으로 공부도 잘했던 청년 마르크스는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맨체스터 방직공장 자본가 아들로서 자신도 자본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왜 마르크스의 사상적 동지이자 후언자가 되었을까?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월소득 2백만워 이하 소득계층의 유권자 샛 가운데 둘이 박근혜 후보를 찍었다고 한다. 사울 강남의 젊은 여성은 왜 촛불 집회에 가담하고 진보정당을 지지할까? 월소득 7백만 원 이상 최고 소득층 유권자 열명 가운데 넷 이상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비정구 노동자가 천만 명이 있다는데 왜 그들은 진보정당에 표를 주지 않을까?
의식 주체는 계급이 아니라 개인이다. 사회적 환경이 곧바로 의식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뇌 활동의 산물이고, 뇌는 유전자가 만든다. 환경의 영향도 물론 있다. 유아기에 부모의 적절한 보호와 자극과 사랑을 받은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사람의 뇌는 계급적 귀속과 상관없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뇌가 시키는 것일까? 인간의 뇌는 짧게는 수백만년, 길게 보면 40억년, 가까운 진화적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도시로 치면 매우 오래된 크고 복잡한 대도시와 같다. 합리적으로 설계에서 만들어진 신도시가 아니다. 음침한 뒷골목에 술집과 홍등가, 조폭의 소굴이 즐비하다. 신시가지에는 권력과 지식, 현대 문명의 상징인 마천루 숲과 정부청사 단지, 호화 주택, 도서관 공원이 있다. 이 도시에는 야만과 문명이 욕망과 이성이 과거와 현재가 혼재한다. 히틑러와 테레사수녀, 이완용과 안중근이 뒤엉켜 산다. 겉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이지만 곳곳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탐욕과 연민, 복수심, 질투심, 동정심, 정의감, 절망, 희망, 고통, 환희...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그 쟁투가 빚어낸 것이다.
뇌구조는 지하실 딸린 2층 집으로 생각할 수 있다. 지하실은 뇌간이다. 척수 바로 위, 대뇌에 있는 뇌간은 파충류의 뇌와 비슷하다고 한다. 뇌간은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생명활동을 담당한다. 위가 비면 배가 고파진다. 땀을 흘리면 목이 마르다. 이런 일은 도마뱀도 한다. 도마뱀은 새끼를 다정하게 껴안고 핥아주진 않는다. 뇌의 1층은 변연계이다. 변연계는 대뇌피질 아래에서 뇌간을 둘러싸고 있다. 편도는 감정을 조절한다. 해마는 기억을 저장한다. 시상하부는 호르몬 분비를 조절한다. 기저핵은 운동을 제어한다. 변연계는 포유류 단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변연계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뇌에서 강한 활성도를 나타낸다. 뇌의 2층은 대뇌피질이다. 대뇌피질은 교양있는 지식인의 거실이다. 대뇌피질은 가장 높이 진화한 고등 포유류의 것이다. 포유류 중에서 침팬지를 비롯한 영장류가 가장 발달한 대뇌피질을 보유하고 있다. 인간은 포유류 중에서도 단연 비대한 대뇌피질을 자랑한다. 인간의 뇌 무게는 약 1.4킬로그램 정도 되는데, 80퍼샌트가 대뇌 피질이다.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며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고 현재의 삶을 설계하는 고도의 지적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대뇌피질이다.
무의식 속에서 오로지 욕망을 따르고,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는 이드는 뇌의 지하실과 1층을 오르내리며 산다. 양심과 이상을 추구하는 슈퍼에고는 2층거실에 기거한다. 에고는 서로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이드와 슈퍼에고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이드는 슈퍼에고의 통제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린다. 이드가 탈출에 성공하면 사람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 욕망과 충동에 휩쓸린다. 생물학적 견지에서 보면 문명은 인간의 대뇌피질이 만든 것이다. 문명은 대뇌피질이 변연계와 뇌간에 대한 관리통제를 강화하는데 성공하는 만큼 발전한다. 삶은 욕망과 규범의 충돌이라는 말에도 공감한다. 규범은 자기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따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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