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근본적으로 다른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타인의 죽음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의 죽음이다. 사람들은 이 둘에 대해 크게 다른 태도를 보인다. 타인의 죽음은 객관적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자기 자신의 죽음에는 주관적 감정적으로 대응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은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기자신의 죽음은 그렇게 대하지 못한다. 어떤 지위를 누렸던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나는 그저 죽을 뿐이다. 그가 누구든 타인의 죽음은 내가 사는 세상의 한 조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나의 삶과 내 자신, 내가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세상, 그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욕망과 감정, 기억과 소망의 덩어리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에고라 불렀다. 이드는 오로지 욕망을 따르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 반면 슈퍼에고는 양심과 이상을 쫓는다. 에고는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는데 필요한 개인적 기준과 원칙을 만들어내며, 그 기준과 원칙에 의거하여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 한다. 이 기준과 원칙이 자아 정체성의 핵심이다. 자아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외부의 위협이나 질병, 생활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생애 전반에 걸쳐 변화한다.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건에 지나지 않는 반면, 나의 죽음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주체, 그 자체의 소멸이다.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나의 존재만 무無로 바뀐다는 것 이것보다 처절한 상실이 있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현대의 어떤 평범한 교양인들도 물질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지난 시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이 몰랐던 것을 많이 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지금보다 아는 것이 빈약했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용감하게 인간의 생각과 행동, 사회 구조와 삶의 양식을 바꾸려고 시도했다. 칼 마르크스는 사회적 환경과 계급적 귀속이 사람의 의식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깊게 관찰한 끝에 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바꾸면, 의식과 문화가 모두 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르크스는인간의 의식과 행동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역사의 시간에서는 바꿀 수 없는 생물학적, 진화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았다. 사회와 문명의 역사는 길게 잡아도 1만 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역사는 고작 수백 년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정보통신혁명은 수십년 전에야 시작 되었다. 인간은 영장류뿐만 아니라 포유류 일반, 심지어 파충류와도 생물학적으로 무언가 공유한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의 밑바닥에는 현실의 사회 제도나 문화 양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생물학적 본능이 도사리고 있다. 제도를 바꾸어도 이것이 바뀌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기심, 독점욕, 질투심, 복수심과 같은 공격적인 충동은 그 본능의 일부이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조건에 집중한 것과 달리, 프로이드는 개인의 심리를 곧바로 들여다보았다. 지난 세기 프로이드 이론은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뿐만 아니라, 인간을 연구하는 인문학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리와 행동은 뇌 활동의 산물이다. 프로이드 시대에는 뇌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외부의 자극과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 호르몬과 신경전달 물질의 과부족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에 대한 신경생리학 지식이 매우 부족했다. 다윈은 인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존재인지 말이 되게 설명하는 데 최초로 성공한 사람이다. 다윈은 모든 종이 동일한 조상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가 사용한 수단은 세심한 관찰과 정교한 추론 뿐이었다. 현대의 진화생물학자들은 이타행동의 메커니즘을 다윈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단순한 사회적재능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본능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의 대뇌피질에는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인지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신경세포인 거울뉴런이 있다.
사람은 욕망과 충동에 끌리고 휘둘리면서도 아직 실현되지 않은 선과 미를 추구한다. 자아는 죽어 소멸한다. 유전자는 살아남는다. 유전자의 영생은 생물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 철학적 가치는 없다. 자기 자신을 나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주체, 지성을 가진 자아는 언제나 단 한번만 존재한다. 유전자는 유전자 일뿐 내가 아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내가 진정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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