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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스승의 눈, 제자의 눈(2)

작은 뉘우침에 큰 길이 열린다. 참회懺悔는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혜능은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참懺이요,  미래에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회悔라고 했다. 참회와 후회는 다르다.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후회는 그 저변에 욕심이 깔려 있다. 반면 참회은 근본 뿌리가 끊어진 곳에서 ‘새사람’으로 바뀌어 나온다.  새사람은 마음이 안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후회속에는 '나'라는 어둠이 있다. 그런 사람은 욕심이 바탕하고 있다.  참회는 뉘우치자마자 새사람이 되어 나온다.  뉘우침 속에 겸허해져 가고 덕이 자라 사람이 넉넉해진다. 참회에는 아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있다. 일 가운데 뉘우침이 있는 사참은 이 세상 인간관계 속에 내가 살고 있는 도량을 준비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참은 나를 이 삶속에서 스스로 돌아보고 ' 내가 살았구나!'하고 생각하는 반조返照의 삶이 온다. 중생은 본성을 떠나면 항상 죄를 짓고 어리석음을 짓기 때문에 없는 일을 만들어 산다. 어려운 장에를 만나면, 우선 뉘우침 대신에 어디로 도망가고 싶어 한다. 참회가 없는 사람의 생활이다.

 

텅빈 푸른 하늘에 홀연히 구름 한점 일듯이, 한 생각이 일어나 그 하나에 의하여 두 생각이 일어나고, 또 그것이 셋이 되고 냇이 되어 계속 이어져 벌어진다. 중생이 생긴 것은 누구의 책임이 아니다.  한 생각이 일어난 뒤 중생이 짓고 받는다. '이렇게 하고 싶다, 저렇게 하고 싶다. 남이 하니 나도 하고 싶다'와 같이 일고 꺼지는 마음만 이어진다. 인연 따라 죄도 짓고 복도 짓는다.  이 윤회 속에 복락은 믿을 수가 없다. 이 몸과 마음은 불완전한 일어나고 꺼지는 곳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본성품에는 생사가 없으므로 참회라 할 것도 없다.  본성품을 깨달았다 해도 몸에 붙어있는 습習들이 육바라밀로 변화하는 시간속에서 뉘우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業이 밝아지고 바른 원력이 자라면서 사람의 폭이 넓어진다.  멸업장진언滅業障眞言 참회진언懺悔眞言이다.  업장 業障이란 우리 몸에 나쁜 습이 된 어두움이 모여 있는 창고라는 의미다. 참회가 있는 곳에 어두운 업장은 시간을 두고 밝아져 나온다.  참회가 없는 삶이라면 불교를 믿는다고 해도 지난날 익힌 나쁜 습들이 밀려와 시끄러운 일들을 떨쳐버릴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空을 空이라 하면 이미 空이 아니다. 여래如來를 여래라 하면 이미 여래가 아니다‘ 라고 하셨다. 우리들 본마음의 성질은 머무르지 않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비시명卽非是名 이름이 여래일 뿐이고 그것은 본 마음에는 없기 때문이다.  空 역시 空이 아니며, 편의상 空일 뿐이다. (어떤 성질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떤 것들은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그래서 공이다)  내가 끼어들면 아상我相, 인상印象이 자리를 잡는 터가 생기고 만다. 입에는 선을 달고 다니지만 마음에는 선이 없다. 경험속에 나는 서 있다. 이해하는 공은 없다. 마음을 떠난 공은 사람에게 이익이 없다. (몸에서 묻어나와 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