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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바닥을 치고 나온 공부

사람 마음속에 있는 佛을 드러낸 석가로부터 시작된 심법인 이 불교는 남인도국 28조 보리달라스님을 통해 그 법이 중국으로 와 각 나라 문화와 생활 패턴속에 섞이면서 그 바깥이 달라져 나온다.  그러나 사람 안에 있는 성품을 만난 불교가 나오면 각 나라 문화가 주는 틀을 벗어나 서로 통하는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된다. 깨달음이 약한 선승들은 언어는 옛사람들이 언어를 쓰나 그 행은 엣사람과 같지 못하다. 우리는 대개 마음속에서 '내게 마음이 있다'라고 안다.  그러나 정직하게 돌아보면 마음이 아닌 것을 마음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성품을 놔두고 미혹된 마음을 마음이라고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미혹 속에 있는 마음은 뿌리가 없는 마음이다.

 

남의 글과 어지러운 말만을 찾아서

묘하고 좋은 이치에 이르렀다고 스스로를 떠들도다.

한갓 수고로이 일생을 헛되게 보내면서

영겁토록 생사에 빠져들도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 놔두고 옛어록 이야기를 이리 알고 저리 알아 이것을 알아야 견성見性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하는 경책이다. 듣고 보는 것은 많은 데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은 우리의 눈이 그런 선문화가 나의 성품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듣고보는 것이 많아도 나에게 와 닿지 않는 것은 무지로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고, 내가 살아가는 습관이 덮고 있기 때문이다. 보고듣는 모든 것이 공부라지만 내 마음이 떠나 있으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애증, 선악, 시비, 분별심에 가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공부는 먼저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좁은 의미에서 견성이다.  나를 내려놓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나를 내려놓아야 마음이 열린다.  마음이 열리지 못하면 분별하고 판단만 하려 한다. 마음이 열려있지 못하면 참된 공부를 할 수 없다.) 공부는 내 마음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품에 바탕을 둔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마다 공부거리이다. 듣는 것마다 관세음보살이고 나타나는 것마다 석가모니 화신이다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이 없고,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 속에서 꽃을 피워낸다.  혜능이 ‘단경’에서  ‘한 티끌이 가리면 그것이 수미산을 만들고, 한 티끌이 벗겨지면 부처가 있는 곳에 있다’ 라고 했다. 佛은 나에게만 있고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이 아니다.  불은 불교를 아는 자에게만 있고 모르는 자에게 없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는 말한다. ‘숨쉬고 있는 모든 생명은 불의 씨앗인 불성이 그대로 있다.’ 우리가 종교를 좁게 만든다.  불교는 특정인 갖는 종교가 아니다. 다만 인연이 먼저 닿아서 믿고 있는 것뿐이다.

 

눈을 뜬 뒤에야 비로소 세상을 보고 배운다. 아는 것이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알고모르는 것이 눈을 덮고 있다. 시끄럽고 어둡다. 우리는 좋은 것만 바라보고 안좋은 것은 싫어한다. 나에게 불리하게 오는 것을 역행이라 하고 좋게 오는 것을 순행이라고 한다. 순행은 누구에게나 좋은 시절이다. 역행에는 공부가 중요하다. 나를 비방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부하기가 좋다. 성경에서는 '주여 왜 저를 버리십니까!  내 뜻대로 하지 말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다.  이 말을 들으면 주님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이 주신 법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준 것이 아니다. 자성이 그런 존재인데 자성에서 스스로 있는 지혜가 나오기 때문에 우리처럼 못 깨들은 사람에게 말할 때 그렇게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말을 잘못 알아듣는다. 성품을 가려놓고 하는 공부는 그 지혜가 좁다. 붙들림 없는 마음은 일체 성인의 마음을 안다. 예수의 말을 보고 그이 성품을 본다. 다른 성인을 바르게 이해하는 눈을 갖는다.

 

부처와 번뇌가 가까이 있다. 회개하라는 것은 돌이킨다는 말이다. 그러면 천국이다.  (인간이 본시 그렇다. 나와 다른 모든 것들을 경계한다. 나에게 익숙할 때까지 나에게 익숙해지기 위해 함께 하는 경험이 필요하고 공부가 필요하다. 자연, 사회, 인간, 모두가 그렇다)  우리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를 쓰면 禪이고 우리가 못 알아듣는 낯선 말은 선이 아니라 한다. 언어가 만든 치우침은 보는 자의 마음의 문이 크게 열려 있지 못한 것을 말한다. 사람 안에 있는 성인의 마음을 경험하면 산스크리스트어를 쓸 때의 사람마음과 우리 마음이 다르지 않지만, 마음을 모르면 산스크리트어나 중국어나 우리말이 사람의 본성을 덮는다. 공부한 사람은 걸릴 줄 아는 것이 공부가 되는 때임을 알아야 한다. 걸릴줄 알아야 회두 공부가 성성해지고 의심이 계속되는 것이지 걸림이 없는데 놓아버리는 곳에 무슨 산 공부가 있겠는가?

 

지금 나에게 있는 온갖 능력을 품고 있는 성품이 미리 다 지어진 소견에 덮여있어 그렇다. 혼자 익힌 부서진 소견은 날마다 이리저리 삐져 나온다.  밝았다, 가려졌다 마지막에 시든다.  불교는 현실 속에 살아있는 자유로움을 갖게 한다. 불법佛法을 알면 제일 먼저 허망한 것을 쫓지않게 되고 가장 가까운데서 사실을 보면 내가 대하는 것마다 새롭다. 미리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바른 법 하나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인정해야 한다. 성품이 닿아있는 자기에게 정직해져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경기가 나빠지면 바닥을 쳐야 경기가 살아난다’는 말이 그 말이다. 불가에서는 '한번 죽었다가 살아나야 다시 산다'는 말이 이것을 대신한다.자기가 스스로에게 있는 성품의 바닥에 발을 딛고 있어야 그 서 있는 곳이 나를 안정시킨다. 경험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온다. 경험이 오지 않으면 '이것일까, 저것일까?' 머리로 알아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구름을 잡는 일에 속한다.

 

사람의 본 자성에는 죄가 없지만 마음이 일어나 죄를 만든다. 천수경의 게송인 ‘죄무자성 종심기罪無自性 從心起 ’가 그것이다.  道라는 것도 성품에 거주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의 얼굴이다. 도는 부처의 마음이자 길이고 생명이다. 그리고 나를 밝혀주는 지혜의 빛이다. 계율은 사람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혜를 탄생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종교를 잘못 가지면 그 속에서 없는 죄를 만들기도 한다. 사람의 생명은 천명에 이어져 있다. 그것이 불성이고, 신성이다. 그리고 性을 중도中道라하고, 그 쓰임을 중용中庸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