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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옛사람들이 쓰는 말

생각이 마음을 먼저 하고 생각을 뒤로 쓰면 그 생각은 힘이 있지만, 생각을 마음이라고 믿고 쓰면 그 생각이 되려 혼란을 일으켜 내 마음이 전도몽상에 묻히게 된다. 깨닫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그 시대의 언어를 둘러쓰고 나온다. 그러나 그 언어속에는 반드시 살아있는 하나의 뜻이 있다. 듣는 자가 자기 마음을 가리고 들으면 부처가 설하는 그 불설은 불설이 아닌 중생의 것이 되고 만다. 옛날에는 자동차가 없었다.  나귀에 짐을 싣고 장을 오간다.  큰 짐을 나를 때는 말을 이용하고, 작은 짐은 나귀가 맡아한다.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 일이 온다’  나귀라는 것은 머리에서 일어난 생각이나 헤아리는 마음, 내일 할 일을 오늘로 가져와 미리 걱정하는 마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돈을 주고 받는 일속에서 일어난 생각들, 가지가지 번뇌망상 등 세상 살아가는 잡다한 생각들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잡다한 생각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고 한다.  공부 중에 한 생각이 일면 '그 생각이 왜 일어날까?' 할 필요가 없다. 화두를 참구하면 곧 없어진다. 화두가 없이 잡다한 생각들이 떨어져 나가기만 바라면 마음만 더 복잡해진다. 화두, 말의 일을 들면 곧 나에게 본시 부터 있는 불성이 와 있음을 안다. 생각들은 저절로 그친다. 사실 우리는 번뇌를 알고 있지만 생각이나 지식으로는 놓아지지 않는다.

 

아는 것과 지혜는 다르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 스스로 소화되어 대소변이 나온다. 소화되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스스로 하고 있다. 이것은 모습이 없다. 모습이 없어도 얻을 수 있다. 부처의 성질이 그렇다. 오온속에 묻혀 사는 우리는 동쪽을 가도 어둡고, 서쪽을 가도 밝지 못하다. 우리는 관심을 다른 곳에 두고 밖을 향한다. 남과 비교하여 물질의 많고 적음에 마음이 가 있다. 나는 형상에 붙들려 있고 道人은 형상을 놓고 산다. 나무는 심지의 땅에 그 뿌리를 두고 그 몸통과 가지, 줄기, 잎사귀가 달려있다. 우리 몸에 보고듣는 것, 손과 발이 붙어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진리가 있는 심지의 땅으로부터 나오면, 그 예술과 학문은 道의 손발이 된다. 우리가 익힌 학문이나 예술이라는 것도 진리라는 한 나무에 달려있는 줄기와 잎사귀와 같은 것이다. 뿌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예술은 시든다.  종교 또한 그렇다. 그런 종교는 사람 속에서 시끄럽기만 하다.

 

공부를 되고 안되고를 떠나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 스승을 믿으면 사소한 스승의 말 한마디에 내가 지키고 있는 마음이 무너진다. 내가 무너져야 길이 드러닌다. 간절한 기도속에 나는 작아지고 작아지면 비워진다.  神은 빈 곳에 형상이 없이 앉아있다. 이 빈곳에서 보는 탐진치는 헛된 구름이다.  믿는 곳이 있어야 포기한다.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포기할 수 있다.  (불교는 무엇에 집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 무엇이 불성이고, 空이다. 그리고 불교는 집착하지 않고 벗어나는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오온이 개공임을 깨닫는 공부다. 무엇에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 포기하는 것도 내 마음이 집중할 무엇이 있어야 포기가 되고 놓을 수 있다.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무엇이 불성이고 성령이다. 그곳에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래야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

 

불성, 신성, 성격, 성질, 자성, 그 성의 본질은 하나다. 성욕 속에도 불성이 있다.  다만 욕慾이 性을 가리고 나온 것이다. 욕이 성에 닿으면 바로 사랑이 된다.  성은 경계에 따라 부서지고, 그 쓰임에 따라 언어가 달라진다. 욕辱이 되기도 하고 성스러운 언어가 되기도 한다.  성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 속에 이 성이 있다. 다만 가려지고 드러나는 것이 다르다. 닭은 땅을 파헤치지만 사람은 물건에 값을 얹어 받는다. 불교는 性을 보는 공부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생존을 위한 본능이 있다. 본능이 성이다. 생존활동을 위한 여러 가지 수단들이다. 어떤 욕구를 내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도 생존활동이다.  행위는 좋고 나쁘다할 수 있지만 본능 자체는 좋다 나쁘다 할 것은 없다. 칼이 좋고 나쁜 것은 아니다. 요리할 때 칼은 좋은 것이고 살인하는 칼은 나쁜 것이다. 필요할 때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성의 본질은 거울과 같다. 거울은 물건을 비추지만 그 물건을 갖고 있지는 않다. 성의 빈 성질이 그렇다. 불교의 空이다.  견성한 사람에게 탐.진.치貪瞋癡는 계정혜戒定慧  (계는 계율을 지켜 실천함을 말하고, 정은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고,.  혜는 미혹을 끊고 진리를 주시한다는 뜻이다)로 바뀌고, 육적이 육바라밀 六波羅蜜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여섯 가지의 수행) 바뀌어 나온다. 성을 덮어놓고 믿는 종교는 시끄럽고 가는 곳마다 무거운 몸만 따라다닌다. 살아있기 때문에 번뇌망상이 일어난다. 생각이 나쁜 것은 아니다. 마음을 떠나 방향이 없이 쓰는 것이 문제다. 아이가 스스로 서고 앉을 줄 아는 것이 성이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성을 드러나게 하는 공부다. 

 

우리가 있다 없다 하는데 그것은 내 생각이다. 얘들이 뛰노는 곳에 아무 마음이 없다.  그러나 놀 줄 안다. 마음에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억압의 씨가 된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마음이 억눌림을 당하면 먼저 긴장이 오고 가는 기운이 거칠어진다. 스스로 존재하는 천명은 비어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스스로 하고 있다. 이 스스로 하는 성질을 천명이라고 한다.  내가 끼어 있는 곳에는 내가 있고, 네가 있기에 업을 짓고 받는다.  그래서 사람은 인과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짓는 과果를 받는다. 우리 성품이 곧 천명이다. 무아無我에서 보는 눈은 이 몸이 인연으로 모였다가 흩어진다고 보고 놔둔다. 몸을 놔둔 자는 눈앞에 널려있는 삼라만상이 내가 된다. ( 열려 있고 뚫려 있기 때문에 그렇다. 나를 버리면 세상에 내가 열려 있고, 삼라만상이 내가 되고 내가 삼라만상이 된다)  형상인 몸을 놔두면 무아가 '나'가 되니 그렇다. 

 

비어있는 곳에 너와 내가 없고, 왼손 오른손이 없다. 두 손은 존재하면서 서로 모른다. 그것은 서로 모르면서 하나에 닿아 있다. 이 닿아 있는 곳에 신이 있으며 빈 곳이다.  이 빈 마음을 예수는 서양 언어로 가난한 마음이라고 달리 말한다. 이 빈 곳은 시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옳고 그름도 없고 선악도 없다. 빈곳에 나도 있고 너도 있다. 신도 있고 부처도 있지만 서로 평등하다. 높고 낮음이 없다. 하늘나라가 이곳이다. 날마다 앉고서고 하는 곳에 있다. 어디를 가나 소통한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가려놓고 칸막이를 둔다. 막는 것이 없다면 앞마당 길이 서울에 닿아있는 것 같다. (내게 막힌 곳이 없다면 온 세상을 갈 수 있다) 작은 길은 큰 길에 닿아있고, 큰 길은 작은 길에 닿아있다. 중생이 부처와 뚫려 잇다. 형상을 취하면 내 마음의 눈이 닫히고, 형상을 놓으면 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