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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스승의 눈, 제자의 눈(1)

사람이 바뀌려면 내 마음에서 새로워져야 한다.  내 마음이 새로워지면 사회도 새롭고 만나는 사람도 새롭고 모든 것이 새롭다.  그러나 내가 안 바뀌고 밖만 바꿔지면 나는 날마다 지루하다.  내가 바뀌려면 내 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품을 봐야 한다. 마음은 빈 성품에 붙어 있는 구름이다.  빈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구름은 떠다닌다. 성품을 본 사람은 오온을 그렇게 본다. 번뇌 또한 그렇다. 가난한 마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마음이다.  禪은 장애없이 뚫어져 있는 길을 향상일구 向上 一句, 화두 중에 이 하나의 뜻을 품고 一句  '이 뭣고!'가 그것이다.  성인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믿는 종교는 미혹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람사이에 벽만 두껍게 하고 어둡다. 예수가 ‘너희는 지금 나의 제자지만 깨달아 미혹이 걷히는 날 너는 나의 형제다’라고 말한 것도 그것이다. 

 

달마의 스승 반야다라는 달마를 중국으로 보내기 전에 중국에는 이미 노자나 공자와 같은 인물이 남기고 간 도덕경이나 중용 속에서 道의 흔적을 보고 보낸 것이다.  다만 흔적은 있지만 깨친 사람이 없었다. 달마는 경을 강의하던 신광법사를 만난다. 신광은 언어속에 묻힌 중국의 도의 언어를 다시 살려낸다. 동쪽에서 보리달마는 초조가 되고 신광은 2대 조사가 되니 그가 혜가 이시다. 달마는 소림굴에서 9년동안 때를 기다렸다.  예수는 사람을 못만난 것이다. 예수는 살아있는 동안 그를 믿고 따르는 자는 많았지만, 깨달은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가신 분이다.  성품을 본 사람은 성경, 논어, 도덕경이 이 성품을 떠나 있지 않은 것을 본다.  진리를 나타낸 이름과 나라마다 문화는 다르지만 사람 속에 뚫려있는 그 성품은 다르지 않다.

 

바리새인(유대인)들이 ‘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으니라‘ (누가복음 17장)  예수가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진리는 존재하지만 형상이 없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상이 없는 것이므로 사람이 만들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숭상하면 그것이 우상이다. 이것을 금강경은 ’32상을 여래라고 하면 여래가 아니다' 라고 보여주고 있다. 선 공부 화두중에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또한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가 그것이다. 우리가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는 것을 안다. 이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은 쉽다. 이 경험은 누구는 하고 누구는 못하고가 없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아는 존재! 우리는 이것을신만이 아는 일이라고 한다. 예수가 말하는 ‘볼 수 없게 임한다’가 그것이다.  배고픈 이가 밥을 먹으면 배부른 안다.  이 아는 것은 나에게 찰나의 시간을 주지 않고 모르게 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이 말을 못알아들은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모세율법에 덮혀 있었기 때문이다‘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 안에 있느니라’ 너를 안 따났다는 말이다.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착의끼반着衣喫飯 하고, 남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물건이 있다. 이 性을 보면 禪의 곳곳에 에수의 메시지가 널려 있다. 

 

사람이 자기 성품을 가린 것이 성인의 말을 스스로 멀게 한다. 이 신성을 바리새인들이 못알아들을 뿐, 그들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진리의 성품을 경험하고 나온 분이다. 다만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다 못하리니’라고 말할 뿐이다. 경험은 언어 이전이다. 뜻은 경험속에 살고 있다. 율법에 눈을 가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뜻 밖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너 안에 있다'는 말은 그들에게 낯설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놔두고 밖으로 찾아나가면 그것이 우상을 짓고 안에 있다고 고집해도 이 또한 빈 성품을 가린다. 종교속에 가린 것이 없으면 너와 나는 이웃이 된다. 가까운 형제가 된다.  하나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은 너 안에 있느니라. 곧 내가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착의끽반, 많은 다른 사람과 말하는 중에 버젓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