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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마음은 기억할 수 없는 것

모든 조사와 선지식들은 곧 이 마음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중 마조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卽佛)' 라는 말로 다시 세존의 말을 살려내고 있다. 세존은 말한다.  ‘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음은 쉴 새없이 활동하고 있으니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가 바쁘게 마음을 쓰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텅 비어 있으니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항상 쓰고 있으니 우리에게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의 마음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아함경)

 

대개 참선이 잘 안되는 것은 이 얻을 수 없는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시작한데서 온다. 얻은 것은 잃는다. 生한 것은 멸滅한다. 만남은 헤어짐을 저절로 기약한 것과 같다.  오감五感이 사물을 만나 만들어진 마음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 마음을 실재하는 마음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음을 없애고 안정을 얻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없애려고 하는 그 마음이 더 번뇌를 만들고 있다. 마음을 조용히 하려고 하지만 조용함은 오지 않는다. 오직 마음이 마음 아닌 줄 알 때라야 마음이 놓아져 조용해진다.  마음의 본성은 비어 있다.  빈 마음은 어떤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곧 無心이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은 이 빈 마음을 만나면 저절로 무너진다. 보리달마는 말한다. '찾는 것은 고통이다. 마음이 마음 아닌 줄 알면 찾는 마음은 그치고 내안에서 부처와 같은 지혜와 덕이 저절로 살아나온다'.

 

대개 사람들은 정신을 집중하는 것으로 마음을 알려고 든다. 이 마음도 놓아야 한다.  놓지 못하면 그 마음이 다툼을 만들고 본마음을 더 가려 버린다.  마음이 마음 아닌줄 알아야 한다. 알면 놓아진다.  너와 내가 살아나는 곳이다.  부처가 계신 곳이다.  우리는 작은 것과 큰 것, 악과 선, 중생과 부처, 이 두 짝을 놔버리면 어디서 든지 하나로 뚫어져 있는 마음을 만난다. 이 마음 바탕을 性이라고 한다.  무심이란 어느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마음이다.  빈 마음이 그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가운데 있지만 형상이 없는 것이어서 볼 수가 없다. 푸른 하늘의 허공과 같다. 허공은 지나가는 구름을 놔둔다. 지나간다는 알고는 있되 그냥 놔두고 있다. 깨어있음의 다른 말이다. 경험이 온 자는 알고는 있지만 기억하여 지키지 않는다. 그것이 지혜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性을 만나면 저절로 무거운 짐이 내려놔진다. 집착이 사라지는 다른 말이다. 그가 말한 가난한 마음은 곧 빈 마음이다. '부처없는 곳에서 머물지 말라'는 조주의 말은 중생심인 탐,진,치에 머물지 말라는 말이다. 금강경에 있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을 조주는 하나의 뜻에 다른 말을 내놓고 있는 것 뿐이다. 부처님은 ‘네 미음이 佛인데 네가 다만 모르고 있다’는 말을 하러 오신 분이다. 우리는 자기자신이 이러한 존재라는 것을 먼저 믿고 서 있어야 한다. 부처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그가 깨달은 것이 그대로 우리안에도 있다는 것을 알고 믿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다. 마음은 가진 것 없이 비어 있을 때 일을 한다. 주인은 나안에 있으면서도 내가 그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다. 뉘우쳐 고쳐잡는 마음이 회개 悔改이다. 번뇌는 사라지고 내게 있는 사랑과 자비가 나온다.

 

누가복음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을 공자의 눈은 달리 말한다. 사람의 명은 천명에 닿아있다. 천명에 닿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보낸 아들과 연결된다. 일체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눈도 그것이다.  바다에서 만난 계곡의 물은 서로 온 곳을 묻지 않는다.  그냥 서로 하나가 되었다. 빈곳에서 만나면 우리도 그렇다. 너를 세워두고 나를 세워두는 땅이 따로 없다. (지금의 사찰은 기업이다. 언제부터 사찰이 그렇게 넓은 땅을 소유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사찰 근처를 가면 가는 곳마다 자기 땅을 지나는 통행료를 내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충실한 삶을 산다.  부처님 이름을 걸고 장사를 한다.  세상 모든 것이 세상 흐름에 따라 변한다 해도 종교는 그래서 안된다. 인간의 영혼을 지키는 종교만은 그 본성을 잃어서는 안된다. 세파에 시달린 인간이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종교는 그래서 안된다.  불교의 근본은 무소유와 평등이다. 이것은 중생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불교 수행자들은 버려진 옷으로 가사로 걸치고, 걸식을 하고 동굴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비로소 공부가 시작된다.)

 

화엄경의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약 사람들이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진리)를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비추어 관할지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다) ’라는 말은 이를 보여주는 말이다. 법의 성품엔 아무 마음이 없다. 가난해져 비어있다. 마음이 없으면 일체 것이 없다. (하나의 인연이 생기면 천가지 만가지 인연으로 이어진다. 결혼을 하면 한 사람으로 인해 많은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진다. 어떤 것을 내 마음속에 두고 있으면 천가지 만가지가 내 마음속에 뿌리내린다. 특히 돈이 그러하다. 인간을 점차 괴물로 만든다. 그것이 마음속에 자리하면 다른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空은 빈 마음이다. 예수가 이야기하는 가난 역시 빈 마음이다.  마음이 비어 있어야 사랑도 자비도 예수도 부처도 들어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