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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한낮에 덮치는 병

아케디아acedia는 한낮의 악마라고도 한다.  수도자들의 병을 뜻하는 아케디아는 흥미로운 그리스어이다. 이는 나태, 게으름 내지는 무관심을 뜻하는데 영어로는 accidie다. 아케디아에 빠진 사람은 한 개인으로서 의미를 상실한다. 또 모든 욕구가 사라지고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끝내 자신이 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나아가 인생 자체에도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한다.  카뮈가 이방인에서 만들어낸 기묘하고 좀비 같은 인물 뫼르소는 이 전통의 대표적인 후손이다.  뫼르소는 세상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이 사회적 기대에 응하지 않을 때에만 본능적으로 반응한다고 생각한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영성가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아케디아의 중심에는 만성적 권태가 있다.  그는 아케디아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막에서 탈출하고픈 은둔자의 욕구, 시종일관 한결같은 삶, 생에 대한 혐오, 멈춰버린 시간을 강조했다.  한없이 되풀이 되고 벗어날 수 없으며,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하고, 불쾌감을 주는 경험이라면 무엇이든지 권태를 낳는다아케디아는 단순히 나태와 타성, 무관심과 무기력이며, 따라서 영성생활에 대한 의지의 결여일 뿐이다. 아케디아는 현재를 벗어나려는 욕망, 피로감, 다채로움을 향한 목마름이다.

 

금욕주의자들과 은둔자들의 권태는 고되고 열악한 삶의 극단적인 고독감과 박탈감에 의해 더욱 극심해 졌다.  좀처럼 다스릴 수 없고,  딱히 이름을 갖다 붙일 수 없는 이 증상을 막아내고 규정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그들은 이를 죄악으로 분류하고 후에는 아케디아라고 불렀다. 기독교의 아케디아는 서양에서 실존적 권태의 전통과 개념화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멜랑콜리아는 흑담즙을 뜻하는 그리스 의학 용어이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멜랑콜리아가 사람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4가지 체액중 하나라고 했다. 나머지 3가지 체액은 점액, 황담즙, 혈액이다.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누스에 따르면 흑담즙이 너무 많은 사람은 멜랑콜리아, 즉 현대적인 말로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고 한다. 천년이 넘도록 막강한 입지를 차지했던 고대의학 체계에서 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앞서 4가지 체액이 균형을 이루어야 했다.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카소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 나로서는 그가 매우 안타깝다.  소위 교육을 많이 받았으나 그걸 누리지 못하고, 인생의 눈부신 장관 앞에 서 있으나 하찮고, 굶주림에 떠는 자신에게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 눈앞에서 영광을 목격하면서도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식을 약동하는 사상과 타오르는 열정과 행동의 에너지로 탈바꿈시키지 못하는 운명. 다만 늘 학구적이고 창조성이 없으며, 야심은 있지만 소심하고 꼼꼼하며, 앞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는 그런 운명. 이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실로 편치 않은 운명이다.’  사르트르는 우연에 대한 개념을 실로 영향력이 대단한 독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에서 끌어냈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단순한 권태(지루한 음악을 듣는 경우, 좋은 음식을 먹어질리는 경우)와 실존적 권태나눈다.  그는 개인이 어떤 환경에 의해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로 빠졌을 때 이 실존적 권태를 겪는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런 개인은 공허함을 느끼고, 주변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 있는 것도 기대하지 못하고, 또 받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권태 이면의 생각에 관심이 많은 교육자인 테레사 벨턴은 논문‘ 권태와 학교’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이 깊은 권태를 ... 무언가를 행하고 실천하는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 거부로 그리고 자신의 존재의 책임에 대한 거부로 간주한다...’  권태는 혐오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혐오감은 구토와 담즙 과다분비로 쉽게 이어진다. 그러므로 실존적 권태의 토대는 생리학적이라 할 수 있다. 로마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는 천식 환자였는데 네로황제 자문관이었다.  그는 권태를 뱃멀미로 이해했고, 자신의 서간중 유명한 구절에서 그리스어‘nausia 구토’를 사용했다. 사르트르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이 구절을 일게 된다. ‘ 언제까지 똑같은 나날이 반복될까?  나는 어김없이 잠에서 깨고 잠자리에 들 것이네.  또 배고플 것이고 춤고 더울 것이네...  밤에 이어 낮이 오고, 낮에 이어 밤이 오고, 여름에 이어 가을이 오고, 가을에 이어 겨울이오고, 또 봄이 오네. 지나간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오네. 나는 어떤 새로운 일도 하지 않네. 어떤 새로운 것도 보지 않지. 그래서 때론 뱃멀미(구토)를 느낀다네. 삶이 고통이 아니라, 공허함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

 

미극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바다 옆의 방’은 권태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전형적인 작품이다.  호퍼의 그림은 이 권태의 법칙을 노골적으로 따른다.  얼핏 보이는 바다 너머 수평선을 무한함을 나타내고, 열린 문은 바다 자체의 끝없는 ‘단조로움’으로 이어진다.  실존적 권태에는 공허함, 고독감, 혐오감과 같은 억누를 수 없는 강렬한 감정들이 따르고,  그 안에서 한 개인은 주변 상황에 줄곧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정의로 실존적 권태를 가장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서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다. 실존적 권태란 권태, 만성적 권태, 우울, 과잉, 좌절감, 잉여, 혐오감, 무관심, 무감정, 속박감이 합쳐진 데서 생겨난 하나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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