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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권태에도 역사가 있나?

권태에 역사가 있는지 물으려면 일단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 인간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권태를 느껴왔는가? 둘째 권태가 늘 인간 삶의 일부였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 이다.  인간은 불행하게도 언제나 권태로울 수 있다. 많은 동물과 인간은 언제든 권태를 느낄 수 있지만,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이 권태를 느낀 건 아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우리와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인간이 그 시대의 경험적 또는 지식적 체계에 속한다고 믿는다. 또 인간의 태도와 특성이 동시대의 사회적 힘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된다고 믿는다.  이런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을 보통 ‘구성주의자’라고 부른다. 반면 이들과반대 입장을 취하는 자들이 본질주의자다. 이들은 인간이 특정한 경험적 체계에 속하지 않고, 인간의 특성과 제도에 어떤 변하지 않는 본질적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회적 행동을 다스리는 근본적인 불변의 법칙들이 있다고 믿는다.

 

구성주의자들은 정서의 평가적인 또는 인지적인 측면이 특정한 사회, 언어, 심지어 성별의 영향을 받는다고 믿는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한번 생각해보자. 그리스인들에게는 두려움이 종종 신중함 으로 여겨졌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로마인들에게 두려움은 타인을 지배하는 행위와 종종 연관되어 있다.  많은 구성주의 연구에서는 불변의 인간적인 특성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사실은 유럽 계몽주의, 산업혁명, 낭만주의 운동과 같은 근대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특성으로는 육아 습관이나 성적 욕망 그리고 화, 사랑, 후회와 같은 보편적인 정서가 있다. 따라서 이들 시대에 생겨난 변화들로 근대의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반면 오늘날 사회과학 분야에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본질주의자들은 ‘본성’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한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에 의해 동물들이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더욱 유리한 방식을 진화시키는 것처럼 유리한 사회적 행동 역시 유전적으로 진화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동물과 인간을 비교하여 추론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보면 심리와 관련된 말인 ‘권태롭게 하다’라는 동사가 1750년 이후에 생겨났다. 그때까지 영어권 세계에서는 권태라는 단어가 없어도 별 문제가 없었다. 18세기 이전에 영국인이 권태를 느꼈다 하더라도 이를 표현하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당사자는 자신이 권태로운지 몰랐을 것이다. 여가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리고 이 시간을 알차게 보내지 못할수록 권태를 느끼기 쉽다. 또 기독교가 쇠퇴하면서 교회가 그동안 지탱했던 공동체의 연대감이 약해지고, 그로 인해 개인의 소외감이 커진다게다가 교회의 쇠락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중요성이 약해지면서 개인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20세기는 어떨까?  이 시기가 권태와 관련하여 왜 그렇게 중요할까?  이 시기에 접어들어 인간의 소외감, 세속화, 전통의 상실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또 단조로운 업무가 주를 이루고 여가생활이 상업화 되었으며, 공동체와 전통에 대한 인식이 와해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권태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해졌다. 션 데즈먼드 힐리에 따르면 권태는 ‘우울하고 침울한 무기력 상태와 분노에 찬 폭력이 번갈아 나타나는 격렬하고 절망적이며, 고통스럽고 방향이 불분명한 짜증을 보여준다고 한다.

 

어떤 특정한 정서를 나타내는 언어적 표현이 없다고 해서 그 정서가 인간이나 동물에게 존재하지 않는 아다. 동물은 기본적 정서뿐만 아니라 권태를 비롯한 사회적 정서도 느낄 수 있다.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라도 권태라는 단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권태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권태가 그들의 삶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 가이다. 다채롭고 변화가 많은 환경에 사는 아이는 단순한 권태를 느낄 일이 별로 없다. 반대로 변화가 없는 환경에 사는 아이는 주기적으로 권태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권태를 느낄 수 있지만, 모든 사회에서 인간이 권태를 느끼는 건 아니다. 철학자 존 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태란 창조된다기 보다는 주기적으로 재발견된다.

 

인류학자 야스민 무샬바쉬의 논문에서 식민지시대 이전의 호주 원주민들은  자기가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순간에 있고자 하는 능력과 의지가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완전히 현재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 순간에 있다’는 것은 호주 원주민들에게 권태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호주원주민들의 언어에 권태란 말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의 호주원주민들은 권태를 느낀다고 무샬바쉬가 지적한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오면서 그리고 그들이 백인문명의 시계, 달력, 목록, 기억의 선형적 형태를 원주민들에게 강요하면서 권태가 생겨났다고 한다. 호주 아웃백에서 원주민들이 살아가기란 꽤 무료할 듯하다. 이글대는 무더위, 도마뱀과 애벌래뿐인 먹을 거리, 질리도록 황량한 풍경을 떠올려보라. 그 동안 익힌 온갖 생존비법을 동원하여 살아남는데 집중하다 보면, 따분함이나 권태를 느낄 새가 없을 것이다. 의식을 행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권태가 비집고 들어올 시간이 줄어든다. 의식은 가장 단순한 행위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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