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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1)

러셀은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선 직접적인 실용성만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폭넓게 생각하는 사고 습관을 함양시키느냐 아니냐로 판단하자고 주장한다. 불관용과 편협함, 그리고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력적인 행동은 그것 자체가 존경할 만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세계가 고통받고 있다. 따라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사회에 필요한 것은 도그마엔 언제든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 자세와 모든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차분하게 숙고하는 일이다.

 

행복의 내용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사람의 행복을 조건짓는 본질은 지구촌 어느 시대의 인간에게나 공통될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흔히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기 쉽다.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은 실용주의와 목적 달성주의에 떠밀려 이익만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진정한 인간성 회복에 꼭 필요한 여유인 것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일이 많으며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에 의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대 산업국가에 필요한 설교는 지금까지 늘 해오던 것과는 전혀 달라야 한다.  사람은 버는 만큼 쓰게 마련이라는 것과 그렇게 소비할 때 고용을 창출하게 된다. 그 사람이 번 돈을 쓰고 사는 한, 돈을 벌 때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가져온 것만큼의 빵을 돈을 쓸 때 사람들의 입에 넣어주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진짜  악당은 저축하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일이란 무엇인가? 지표면에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첫 번째 종류의 일은 즐겁지 못하고 보수도 박하다.  두 번째 일은 즐겁고 보수도 높다. 또 다른 계층은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남들에게 일할수 있는 온전을 베푼 대가를 받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지주들은 게으르다.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인간은 열심히 일해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정도 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필요를 웃도는 작은 양의 잉여물이 생긴다해도 전사나 사제집단에게 돌아갔다.

 

기근이 닥칠때는 전혀 잉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이 굶어죽는 반면, 전사와 사제들은 평상시처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공산당원이 전사와 사제들의 특권을 계승했다.  우리가 근로의 바람직성과 관련해 당연시 여기고 있는 많은 내용들이 이 체제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산업사회 이전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대 세계에는 적합하지 않다. 현대의 기술은 여가를 소수 특권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주었다. 원시공동체의 경우 농부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면 얼마 안되는 잉여를 전사와 사제들에게 나눠주기보단 차라리 잉여가 생기지 않도록 생산을 줄이거나 소비를 늘렸을 것이다. 처음에 전사와 사제들은 힘으로 강제하여 농부들을 생산케 하고 잉여를 내놓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한 대가의 일부가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로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이 농부들의 본분이라는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물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이익과 인류 전체의 이익은 동일하다고 어거지로 믿음으로써 스스로에게도 이 사실을 은폐한다.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필수품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그리나 일이 의무가 되므로 사람들은 그가 생산한 것에 비례해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근면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미덕에 비례해 임금을 받는다.  이것이야 말로 노예국가의 도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생겨난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모든 이들의 노동시간을 8 시간에서 4 시간으로 조정 되어도 모두 종전처럼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노동시간을 여전히 8시간씩 일하고, 핀은 남아돌고, 파산하는 고용주가 생겨나고, 핀 제조에 관계했던 인원의 절반이 직장에서 내쫓긴다. 4시간씩 일했을 때 여가가 창출된다. 그러나 인력절반은 손을 놓고 노는 동안 나머지 절반은 과로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불가피하게 생긴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 커녕 온 사방에 고통을 야기시킬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여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부자들에겐 언제나 충격이었다.  (그들은 노동자가 노는 꼴을 보지 못한다) 노동은 어른에게 술을 덜 먹게 한다고 하며 노동을 권장했다. 도시 근로자들이 투표권을 따낸 직후에는 공휴일이 법으로 정해지자 상류층이 대단히 분개했다.  오늘날은 그보다 덜 노골적이지만, 그 정서는 그대로 남아 경제적 혼란의 뿌리가 되고 있다.  소련을 제외한 모든 현대사회는 최소한의 일조차도 피해가는 사람들, 다시말해 돈을 상속받은 이들이나 돈과 결혼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굳이 파고들고 싶지 않다.  이 사람들에게 게으름이 허용되는 것이 임금노동자들이 과로하거나 굶어죽는다는 사실보다 해로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만일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부자들에겐 충격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여가가 주어지면, 어떻게 사용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