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부터 건축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온기와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순수 실용적인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목적으로써 어떤 이념을 돌로 웅대하게 표현해서, 인류에게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전자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의 거주지를 통해 충족되었다. 그러나 신전이나 왕궁은 하늘의 신들과 그들이 지상에서 총애하는 자들에게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중세시대에 최고의 건축을 세운 것은 봉건주의가 아니라 교회와 상업이었다. 성당들은 신과 주교들의 영화를 과시했다. 공작들을 돈으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휘황찬란한 천을 두른 연회장들과 플랑드르 시영건물을 지어 오만함과 과시했고, 수많은 영국의 도시에도 장대한 건물을 지었다. 베니스와 제노바의 도시 권력가들은 독거할 필요도 방어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서로 나란히 붙어살면서 별 호기심 없는 이방인이 보아도 모든 것이 웅대하고, 미적으로 뛰어난 도시를 빚어냈다.
사원, 수도원, 수녀원, 대학 등이 제한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동체주의에 기초해 세워졌고, 평화로운 사회생활을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이러한 건물내에서는 개인의 공간은 엄격하고 간소한 반면, 공동의 공간은 웅대하고 여유가 있었다. 사무실 밀집단지, 주거용 아파트, 호텔 따위가 대표적이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수도원의 수도승처럼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으면, 오히려 가능한 한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지내려고 애쓴다. 거리마다 소규모 주택- 이곳에선 각각의 주택이 개인생활의 중심이며- 공동생활은 사무실, 공장, 혹은 지역에 따라 광산 등으로 대표된다. 가정을 벗어난 사회생활은 철저하게 경제적 성격을 띠며, 경제외적인 사회적 필요들은 모두 가정내에서 만족 되어야 하거나 좌절된 상태로 남겨지게 된다. 공장들과 열 지은 소규모 주택들은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현대생활의 기묘한 불일치를 잘 보여준다. 생산은 점차로 대규모 집단이 되어가는 반면, 정치와 경제영역을 벗어난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시각은 점점 더 개인주의적으로 되어가는 추세다.
일은 고되고 생활은 단조롭고 여자는 집에 갇힌 죄수꼴이다. 여자들은 공동체적 생활방식을 택하기보다는 현재의 생활방식을 더 선호한다. 고립된 상태가 그녀의 자존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성해방운동과 투표권 획득에도 불구하고, 아내들의 지위는 적어도 임금 노동자 계층에서는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남편쪽에서는 아내가 자신만을 위해 일하면서,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 있는 상태를 은근히 즐긴다. 게다가 아내와 집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의 소유본능을 충족시켜 준다.
노동계급 가정의 아이는 학교들어가기 전까지 햇빛과 공기를 너무 적게 접한다. 아이들다운 행동을 해도 전혀 해가 되지 않을 자유나 공간이 없다. 이 같은 상황이 아이들을 허약하고 신경질적이고 억눌려지게 만드는 수가 많다. 아내에게는 언제나 지쳐있어서 아이들마저 기쁨을 주는 존재라기보다 성가시게만 느껴진다. 남편은 일을 마치면 여가를 즐기지만, 그녀에겐 여가라는 게 없다. 결국 그녀가 짜증을 잘내고, 속좁고, 시기로 가득찬 사람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다. 이러한 문제들을 치유하려면, 건축물이 공동체적 요소를 도입하기만 하면 된다. 독립된 작은 주택들과 집집마다 자기 부엌이 있는 공동주택 단지들은 철거 되어야만 한다. 대신 그 자리에 중앙 뜰을 중심으로 몇 동의 건물을 높이 쌓아 올리되 일조를 위해 남향 건물을 낮게 한다. 공동의 부엌과 널찍한 식당, 오락과 회합과 영화감상을 위한 회관이 갖추어져야 한다. 모든 아이들은 보육원에서 챙겨주고 이곳에서 저희들끼리 놀게 하되 아이의 안전을 위해 최소한의 감독이 필요하다. 맑은 공기와 햇빛, 넉넉한 공간, 좋은 음식은 아이들을 건강하게 만들고, 맘껏 자유를 누리고, 금지 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성격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된다. 어린아이의 행동을 끊임없이 금지하는 것은 아이가 훗날 불만이 많고 소심한 어른으로 자라게 되는 원인이 된다.
산업주의 경향은 애초부터 생산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소비와 일상생활에는 별로 역점을 두지않았다. 이것은 생산에 관계된 이윤을 강조한 결과다. 인간활동 가운데 가장 무계획적이고 비조직적이며, 불만족스러운 것은, 금전상의 이익을 기대할 수 없는 부문들이라는 시각이 대두된 것은, ' 이윤창출' 이란 동기가 지배적인데서 나온 당연한 결과이다. 내가 제안한 건축상의 개혁에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보다도 임금 노동자들 스스로의 심리상태에 있다. 사람들은 아무리 싸우고 살아도 가정이란 프라이버시를 좋아하며그 안에서 자존심과 소유욕의 충족을 찾는다. 내가 주장한 것과 유사한 협동조합의 건설은 크게 볼 때, 대규모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서만 가능하다. 이윤동기만 가지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윤추구가 경제활동을 규정하는 한, 아이들의 건강 및 성격과 아내들의 신경은 계속 고통 받게 될 것이다. 근심 및 가난과 마찬가지로 추악함도 우리가 이윤창출이란 동기의 노예가 되어 있음으로 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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