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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고 있

좋은 삶1

모든 사회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정한다. 이 기준은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정체선에 좌우되고, 이는 다시 지배 서사와 그로부터 나오는 통치권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모든 사회는 건강과 질병을 동시에 주며, 따라서 우리는 판단을 내릴 때마다 이는 양극단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조직은 졍체성의 형성에 관하여 두가지 기본과정, 즉 동화 및 분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정체성의 발달은 두가지 기본방향, 즉 타인과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과 자율을 지향하는 욕망에 의해결정된다. 바람직한 경우, 이 두가지 욕망이 균형을 이룬다. 첫번째 방향은 동일성의 욕망, 즉 집단 형성과 복종의 욕망이며, 두 번째는 차이 즉 개인주의 독립의 욕망이다. 사회집단이 너무 약하게 형성 되면, 개인은 타인에게 다가가고픈 욕망을 느낀다. 집단이 너무 강하게 형성되면, 개인의 욕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전체주의 국가일수록 자율의 갈망은 강하고, 학교의 규칙이 엄격할수록 조금이나마 개인 특성을 드러내려 한다.

 

불과 몇세대전만 해도 사회는 고인물처럼 변화가 없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자율의 욕망이 자라났고 이는 침입과 과도한 통제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지금 사회에선 개인이 중심이며, 이로 인해 안정감이 사라지고 불신이 늘어난다. 공격성은 더 빨리 외부로 향한다. 잠재적 위험인 타인에 맞서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이 실종되고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부상한 주요 원인은, 시림들을 체계적으로 서로 반목하게하고 불평등을 심화 시키는 오늘날의 경제모델이다. 공동체 의식과 자울성의 균형을 되찾고 싶다면, 오늘날의 노동환경을 바꾸고, 경제를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현실정치는 주식시장의 피리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한 세대의 회색쥐를 양산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적 경쟁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단호하게 대변하는 넓은 스펙트럼의 정당들이다. 나는 ‘정치는 증권시장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라던 드골장군의 말에 동의를 표하는 바이다.  경제가 사회를 따라야지 사회가 경제를 쫓아가서 안된다. 사회는 동일성과 차이, 공동체와 개인의 균형이 유지될 때 제 기능을 다한다.

 

신자유주의, 디지털화, 숫자에 대한 불합리한 맹신이 어우러지면서 이중효과가 발생한다. 우리는 규제가 매우 심한 사회에 살고 있지만, 아무리 찾아도 권위는 없다. 사제는 신의 권위를 대변했고, 의원들은 국민의 대변인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권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에 의심이 실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권위의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권위적 체제는 독재의 동의어가 되었고, 사제 교사, 정치인, 지도자를 가리지 않고, 권위자는 예외 없이 무너뜨려야 하는 독재자가 되어버렸다. 민주주의에선 지배자 대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권한이 임시적으로 위임되는 것이며,  이때 인간은 어떤 기능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상징적인 전통적인 권위는 거친 폭력이라는 뜻으로 변했다. 우리의 반응은 양가성을 띠고 있다. 권력은 의심스럽다. 그래서 최대한 격렬하게 싸워 물리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줄 강한 지도자는 필요하다.

 

나는 우리 정체성의 본질이 대부분 애정생활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파트너이며, 누군가의 엄마 아빠이며 누군가의 형제자매이다. 이와 함께 또하나의 중요한 기둥이 있다. 바로 직업의 정체성이다. 두 경우 모두 타인과의 관계가 우리의 자존감을 좌우하지만, 직장생활에서는 여기에 전문능력이 추가된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느끼는지는 대부분 직장 및 동료와 맺는 관계에 달려있다. 무엇이 효율적인 노동을 가능하게 할까?  일터 및 일과 관련하여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까? 어떻게 하면 효율성과 행복, 이 두가지를잘 결합할 수 있을까? 직장생활로 인한 우울증은 힘든 노동이나 과도한 노동부담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환경 특히 인간관계와 관련이 깊다고 한다. 상호존중과 인정의 결핍은 탈진증후군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수입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외부의 보상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경제적 자극이 동기를 높이는 경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노동에 한정된다. 창의성이 요구되는 일터라면 더더욱 내적 동기가 더 많은 효과를 발휘한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식경제 체제이다.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일하는 단순노동의 경우 보너스가 긍정효과를 빌휘한다. 오늘날의 보너스 제도는 소득격차를 심화시키며, 비로 이런 차이가 거의 모든 부정적인 심리사회적 효과를 몰고온다. 내적동기에 관심을 쏟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공익을 대변하려는 정치가라면 명심해야 한다. 내적동기란 무엇인가?  핑크는 세 단어로 요약했다. 자율성, 장인의 기술, 목표. 자립적인 조직에서 자기 일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으면 동기와 참여가 급상승 한다. 이를 통해 장인의 기술과 능력도 자동적으로 자랄 테고 다시금, 일에 더 많은 재미를 느낄 것이다. 목푠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 그리고 혼자 할 수 없는 일에 자신도 기여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공동체의 일부가 되었다는 소속감을 느낀다.

 

그런데 오늘날은 정반대이다. 고도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 조차도 약간의 책임만 질뿐 권력이 없다. 자기가 직접 해야할 일인데도 결정과정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숫자의 독재는 정보와 결합하여 기회를 빼앗고 상부의 결정을 직접 하부로 전달한다. 결정의 자유가 줄어들수록 노동은 점점 더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무엇보다 인간관계에서 그러하다. 타인의 권력에 복종해야 할수록 내 삶을 내가 통제한다는 느낌이 떨어진다. 히향식 원칙에 따라 조직된 노동은 목표의 정의는 물론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능력과 기술이 실종된다무력하고 수동적인 느낌이 날로 심해진다. 모든 연구결과는 자율성과 결정권을 촉진하고, 더 높은 목표를 위해 함께 일한다는 느낌을 주는 환경이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리고 수입이 일정한 단계에 오르면, 보너스의 매력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또 보수가 없거나 아주 적은 일을 하면서도 만족감과 자존감,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프랑크 판 마센호베는 이미 10년전부터 벨기에연방 사회복지 공공서비스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여기선 무두가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 원하는 방식대로 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자유가 너무 많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매우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노동 핵심입니다’ 결과는 놀랍다. 벨기에의 모든 복지 관공서를 통틀어 이곳 실적이 가장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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