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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고 있

장애를 대량 생산하는 사회2

범주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카테고리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놀랍게도 이 말은 '공개적으로 죄를 씌우다'라는 뜻이다. 이언 존스턴에 따르면 분류체계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도덕적 구분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혁명적 사상가가 혁명적인 이유도 바로 이들이 새로운 분류체계를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목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모든 범주화는 암묵적이든, 노골적이든 정치적, 도덕적 의미를 따르는 서열화이다다윈의 중요성은 그가 과거의 자연질서를 떠났다는 데 있다. 신이 만든 자연의 사다리를 진화의 질서로 대체했다는데 있다. 한 인간의 문제를 중심에 두는 나의 입장과는 달리 DSM (미국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의 심리진단 분류법은 꼬리표를, 도덕적 질서를 앞세운다. 한 사람에게 꼬리표를 붙여 죄를 씌운 다음 연행하는 것이다꼬리표 붙은 사람들은 아무 불평없이 자진하여 신발을 신고 따라 나선다. 살패자에게 정신병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짓은 아동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인들도 마찬가지로 꼬리표 부착 대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인의 장애중 상당수가 사회의 이상을 너무 잘 따랐기 때문이다. 즐겨야 한다는 의무는 섹스중독, 거식증, 쇼핑중독 같은 잘못으로 이어진다. 성공과 장애의 경계는 매우 가깝다.

 

실패에 대한 공포와 사회공포, 즉 나를 평가하거나 나와 경쟁하는 사람에 대한 공포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조금만 일이 지체 되어도 예상치 못한 일이 한번만 일어나도, 더 잘 더 빨리 하기 위해 페달을 더 세게 밟는다. 관계문제를 겪고 있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지를 보여준다. 고독은 우리시대의 가장 흔한 장애이다. 교육자문, 보충수업, 심리치료, 가족상담, 그리고 무엇보다 심리사회적 문제의 약품화가 문제의 현장이다. 이 모든 것들이 많은 돈을 벌어주는 사업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장의 고통분모는 훈육이다. 우리의 언어 뒤편에 숨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우리의 어휘변화에는 항상 숨은 의미가 깃들어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심리학과 정신의학이라는 말을 썼지만, 요즘은 행동학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환자가 벌을 받고 범죄자가 치료를 받는 사회. 실제 오늘날 미국에서는 정신병원에서 치료받는 정신병환자보다 감옥에 수감된 정신병 환자의 숫자가 세배는 더 많다. 훈육은 정신의학치료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정신의학이란 환자를 도와주는 의학의 한 분과가 아닌가?  오늘날 넘쳐나는 정신병 꼬리표는 세가지 층위에 이루어져있다. 심리학적 층위, 사회적 층위, 의학적 층위다. 심리학적 층위는 눈에 보이는 외면으로 정신적 특성과 행동특징을 설명한다. 사회적 측면은 찾아내기 조금 힘들다. 사회규범에 비추어 볼 때, 과도하게 많거나 과도하게 적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자나치게' 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의학의 측면은 과학적 증거도 없는 질병모델을 근거로 세운 가정일 뿐이다. ADHD 아이가 자기교실에서 조용히 앉아 수업을 들으면 문제는 해결된다. 달리 말해 장애는 아이가 아니라, 우리에게 부모나 교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에게 리탈린을 먹이며, 행동치료사들도 이미 오래전에 중지되었던 초보형태의 행동치료들을 실행한다.

 

치료에서 훈육으로 이동하는 추세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70년대까지 정신의학은 누가 봐도 훈육과 시스템의 안전화에 역점을 두었다. 심리치료는 사람들에게 너무 엄격한 규범과 이로 인한 죄책감 및 수치심과 거리를 두라고 가르쳤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것이 허용되고, 소비가 의무인 매우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다. 문제는 자력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서둘러 장애나 게으름의 꼬리표가 붙는다. 오늘날엔 훈육이 너무 적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정신과 의사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다.정신과 의사와 심리치료사들이 새로운 도덕적 권위자가 되어 학문의 이름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명령한다. 하지만 1970년대와 달리 저항이 미미하거나 아예 없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훈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증거이다.

 

요즘은 슈퍼대디가 아니라 슈포내니이다. 책임은 엄마에게 돌아가고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기능이 사라졌기에 실종되었다. 서구사회에는 전통에 기초를 둔 상징적 권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익명의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런 권력에게는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콜센타이다. 수도 없이 전화를 해서 겨우 상대가 전화를 받아도 책임자와 연결이 안된다. 책임자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의 중심은 비어있고 의자엔 아무도 앉아있지 않다. 아버지들은 쓸모가 없어졌다. 부모는 시스템 탓에 장애를 안게된 자식을 도와주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들 역시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다 결국 도착한 종착역은 복지서비스의 콜센터이다.

 

훈육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내재한다. 신자유주의가 상징적 권위 및 이에 대한 신뢰를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그 걸과 만인은 만인을 불신하고 이는 지속적인 통제와 평가로 이어지며, 규제철폐와 자유시장을 주장온갖 외침에도 끝없는 규제와 날로 늘어나는 계약을 낳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권력을 확인할 수 없고, 일제히 저항도 하기 힘들다. 푸코는 사회개혁가인 벤덤의 이상적 감옥을 비유로 끌어다 쓴다. 그의 감옥 한복판에는 감시탑이 우뚝 솟아있어서 보이지 않는 감시인이 자신의 모습을 감춘채 모든 수감자를 관찰 할 수 있다. 우리는 거리에 있어도, 탈레비젼을 켜도 잡지를 펼쳐도, 어떻게 행동해야 완벽한 규정에 도달할 수 있는지 눈과 귀가 따갑도록 보고 듣는다. 쉬지 않고 정체모를 평가를 받아야 하고, 예방검진과 회계감사와 시험에 참여해야 한다. 게다가 부단이 스스로 평가해야 한다.

 

오늘날 훈육의 심리학은 개인과 그 장애가 이 사회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 모든 공동체는 정상과 비정상의 관념을 정의하고 형성한다. 그러니까 지배적인 사고모델이 실제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사고 모델이 표준인가에 따라 실제도 달라진다.  종교적 모델( 규범을 위반하는 자는 죄인이고 마녀), 의학적 모델( 규범을 위반하는 자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 경제적 모델( 규범을 위반하는자 기생충)중 무엇이 지배적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경계선 이편에 있으면 우리는 정상이고, 저편에 있으면 그들은 비정상인이다. 그래서 어떤 관점으로보고 어떤 결론을 끌어내느냐에 따라 같은 사람이 어떤 때 순교자가 되고, 위험한 정신병 환자가 될 수 있고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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