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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고 있

좋은 삶2

신자유주의 역시 소위 자유시장과 규제철폐를 외치며 등장했지만, 실제로는 순식간에 의욕을 말살시키는 납처럼 무거운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 자유시장은 구호일뿐, 신자유주의 조직은 생산성 향상과 경쟁을 목표로 쉬지 않고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는 중앙의 엄격한 정책을 통해 작동한다. 감시를 하는 중앙의 감시인이 없다는 점에서, 비어 있다. 하지만 그 자리를 이제 컴퓨터가 대신 차지한다. 물론 컴퓨터가 인류에게 암울한 미래를 안겨줄거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일체의 기술혁신이 그러하듯 디지털화 역시 인간의 특정한 강박을 더욱 부채질 한다. 숫자에 대한 가장 큰 착각은 그것이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라는 생각이다. 대부분은 정반대다. 숫자는 현실의 특정 이미지를 창조한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특정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치를 제시하며, 그 기대 역시 항상 어느 정도 숨은 이데올로기에 기초 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이 이미지가 결정 과정을 좌우하는 것이다.

 

독일 기자 권터 발라프는 ‘기아, 임금문제 해결도 시급한 문제이지만 이 못지 않게 인간답지 못한 대우,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다는 느낌이 더욱 견디기 힘들다. 그러다보면 인생의 패자가 된 듯한 수치심이 들고, 최대한 남들의 주목을 받지 않으려 하게 된다. 한때의 침묵하는 다수는 이제 자신들의 힘겨운 상황을 최대한 외부에 알리려 하지 않는 고립된 집단 속의 보이지 않는 다수가 되어버렸다. 이제 다시 연대감을 짓밟는다.’ 빌라프는 '숫자가 주연을 맡는 평가는 노동의 만족도와 의욕, 충성심, 회사와의 일체감에 치명적이다. 창의성과 자율성을 짓밟고 모욕감을 주고 자존감을 훼손시킨다'고 한다. 평가를 옹호하는 쪽에선 품질이 오르고 인재가 보상을 받는다는 논리다. 하지만 숫자로 인한 양적평가는 품질을 떨어뜨린다. 결국 관료주의가 심해지고 그러다 보면, 정작 핵심업무에 쏟을 시간은 줄어들고, 숫자 채우기에 급급한 노동자에게 품질을 돌볼 여유가 없다. 경찰은  치안에 힘쓰지 못하고, 교사는 수업에 치중하지 못한다. 결국 일하는 사람은 의욕을 잃어버린다.

 

평가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나도 이의가 없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에고와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정체성을 키우고 있는 시대이니 만큼 평가는 불가피하다. 다만 어떤 형태의 평가가 가장 바람직할까? 그것이 문제다. 객관적 측정은 망상이다.  직원들은 직장 상사와 협의하여 목표와 기준을 정하고, 이 기준에 맞추어 성공이냐, 실패냐를 판단한다. 일의 어떤 요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어떻게 하면 될까? 이런 것들을 협의를 통해 정해야 한다. 경제위기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었다. 사방에서 변화해야 한다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대중에 영합하는 자들은 타락한 지도층에게 죄를 묻고, 지식인들은 시스템에 정치가와 경제학자들은 시장에 책임을 돌린다. 모두가 똑같은 확신을 품고 있다. '어쨌든 내탓은 아냐, 나는 피해자일 뿐이야' 남들이, 다시말해 외국인, 실업수당을 받는 실업자들, 탐욕스러운 은행가, 인정머리 없는 경영인... 이 남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저항은 익명의 괴물을 향하고, 무의미한 길거리 폭력과 우울한 무기력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증시 역시 같은 모습이다. 과잉행동증후군 아이처럼 뛰어다니다가 다시 바닥을 모르고 추락한다. 양극성 장애(조울증)은 신자유주의 자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해결책 역시 외부에서 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 기적의 묘약이 있거나, 모든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줄 새로운 영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 탓에 진실을 놓치고 만다. 그 사이 우리 모두가 많건, 적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었다는 진실말이다. 직원을 자르는 경영자에 대한 분노는 상당히 근시안적이다. 해고는 단기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내고 싶어하는 주주들 때문에 일어난다. 모든 주주가 그런 결정에 공동책임이 있는 것이다. 모두가 항상 더 싼 제품을 원하기에 공장을 인건비가 싼 곳으로 이전한다. 포스트모던시대 인간은 이상한 분열에 시달린다. 새로운 형태의 인격분열 이다. 우리는 체제를 비판하고, 체제에 적대적이면서도 변화를 꾀할 만큼 힘이 없다고 느낀다. 또 한편으로는 이 체제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이동하고, 여행하는 방법이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는 우리가 비난하는 그 체제의 일부다. 타인들만 변해야 하는 것아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자신도 변해야 한다. 무엇보다 생활방식을 바뀌어야 한다. 먼저 냉소주의를 버려야 한다.

 

TINA(There is no alternative)신드롬은 오늘날 위기가 환상의 위기임을 보여준다. 이로인해 '우리는 이러다 죽지 뭐,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자' 같은 식으로 숙명론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기주의, 경쟁의식, 공격성은 당연히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하지만 이타주의, 협력, 연대감, 요컨대 선의 평범함 역시 똑같은 인간의 본성이며, 이중 어떤 것이 주도권을 잡느냐는 환경이 결정한다. 무기력이 우울을 부르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아무것도 할수 없어. 무엇도 도움이 안돼. 이 사회가 문제야'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하지만 이런 확신이 우위를 점하면 우울증이 심해진다.  이것을 이기는 것은 일부나마 자기가 책임지는 인생의 한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다.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시민이 되어야 한다. 정치가에게 공익을 실천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 역시 공익을 개인 이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할 책임이 있다. 그러자면 물질을 포기하고, 다시금 새로운 윤리를 키워나가야 한다. 이 윤리는 항상 자율과 연대, 개인과 집단의 균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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