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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고 있

좋은 삶3

 

누구나 쉽게 기억할 수 있어 널리 회자되는 키워드는, 숨어있던 직관의 문을 열어 행동을 자극한다. 우리는 흔히 합리적-인지적 방법을 통해서만 행동이 변한다고 믿는다. 오랜 새월동안 이런 전략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계몽주의라는 유사종교의 관점을 버리지 못하고, 인간을 여전히 합리적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정 메시지는 그것이 깊이 뿌리내린 감정과 가치를 건드릴 때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 깊이 뿌리를 내렸다는 비유는 우리가 이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며, 나아가 이것이 여기저기로 뻗어간다는 의미이다. 요즘 심리학은 딥 프레임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정체성이 우리가 환경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에 기초하며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인간은 동일한 복합물이나 프레임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니까 집단차원에서도 키워드를 통한 활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딥 프레임 연구는 일련의 중요한 특징을 밝혀냈다. 예를 들어 여러모델은 나란히 배열된 것이 아니라 서로 대립한다. 혹은 특정 해석모델의 한 측면이나 가치가 활성화되면 자동적으로 해당 모델의 다른측면까지도 모두 불려나온다. 또 한가지 해석모델 혹은 복합물이 활성화되면, 대립하는 모델의 의미는 사라진다. 개별 복합체는 다른 범주에 소속되며, 이 범주들은 보통 목표와 가치가 사로 다른 대립하는 두 개의 프레임을 의미한다.

 

한쪽에서는 신체건강, 인기, 경쟁, 출세, 돈, 사치 같은 특징들이 발견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인기라는 가치가 활성화 될 경우, 이 자극은 자동적으로 이와 관련된 인생목표, 즉 경쟁이나 돈으로까지 뻗어나갈 것이다. 반대로 다른 프레임에는 정신건강, 자율성, 연대의식, 협력, 행복, 영적 가치 등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자율성의 가치가 활성화되면 자동적으로 이와 관련된 것들의 의미가 커지고, 반대로 인기나 경쟁은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복합체 혹은 프레임은 두가지 다른 도덕관을 가진 두가지 다른 정체성의 표현이다. 안정된 정체성을 쌓으려면 동화는 물론 분리의 과정도 필요한 것이다. 능력을 지향하는 수업은 우리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경쟁과 출세의 복합체로 그것과 결부된 온갖 가치로 이끌어 간다. 하지만 그런 수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동적으로 두번째 집단의 규범과 가치를 희생시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경쟁하는 연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둘의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인지부조화라 불리는 심리학의 현성에서 아주 잘 확인된다.

 

툭정한 가치에 고착된 복합체를 굳게 믿는 사람은 이런 복합체와 대립되는 정보는 아무리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인 정보라해도 인식하지 못한다. 연대의식, 공동체의식, 영성이 중요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경쟁력, 물질주의의 장점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개인주의와 경쟁력, 물질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연대감과 공동체 의식, 영성의 장점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인정할 수가 없다. 변화를 원한다면 합리적인 요인보다 정서적 가치를 통해야 한다. 두뇌는 소용없다. 직관이 유용하다. 연대는 합리적 논리로 강요할 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이 에고를 숭배하는 현실에서는 자기행복의 배려야말로 최고의 출발점인 듯하다. 좋은삶, 행복한삶은 어디에 있는가?  변화란 인식이나 깨들음보다 정서적으로 느끼는 가치와 관련이 더 깊다. 변화를 원한다면 지식만으로 안된다. 자기배려를 이기심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기란 얼마나 힘든가?  더 많은 돈, 더 많은 편리함, 더 매력적인 몸, 이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경쟁과 질투를 낳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정말로 더 행복하다고 느낄까?  그것이 정말로 자기배려인가?

 

마초같은 경쟁의식은 자기배려와는 아무 상관없고 즐겁지도 않다. 누군가는 나보다 더 나은 성과를 올릴테고 누군가는 더 비싼 제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하려면 반드시 남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배려와 정체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 시킨다.  우리의 정체성은 타인의 정체성과 뗄려야 뗄 수가 없다. 나의 정체성이 변하면 이는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음식과 술, 섹스와 미용에 관한 한 우리는 쓰러질 때까지 즐겨야 한다. 그렇게 즐기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느끼나?  과유불급이다. 기껏해야 따분함을 느낄테고, 더 심하면 장애와 예속을 낳는다. 그렇기에 모든 윤리체계는 절제와 자제를 명령하며, 여기에는 자유의 이념이 함께 한다. 예속이라는 개념은 부자유, 노예상태를 의미한다. 현실의 부정적 결과는 모든 것을 가졌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참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면 우리는 자기 몸으로 경험한다. 돈이나 안락은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더 많은 행복을 선사하지 못한다. 오히려 반대이다. 실망만 늘어난다. 물질이 쌓일수록 물질로는 보상할수 없는 뭔가 근본적인 것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렬해진다.

 

실존적 차원의 결핍에 삶의 위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물질적 대답은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죄와 책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의 흔한 방응은 최대한 빨리 구체적인 책임자를 찾는 것이다. 아이가 너무 뚱뚱하다고?  패스트푸드 책임이다.  눈이 내려 도로가 꽉 막혔다고? 기상청 책임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고, 인생이나 사랑이나 죽음같은 중요한 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수 없다고 생각하면 견디기 힘들다. 그 때문에 이런 결핍이야말로 창의성의 원천이며, 타인들과 힘을 합하여 추구해 나갈 더 숭고한 목표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 이런 목표가 학문일지 이데올로기일지 예술일지, 종교일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람들을 한데 엮어 중요한 질문에 공동의 대답을 찾는 공동체를 꾸려준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자기배려는 집단적인 배려와 나란히 존재하거나 때로는 대립되지만, 결코 상호종속은 피할 수가 없다. 개인의 자유가 너무 크다고, 공동체의 영향력이 너무 작다고 생각하여 이 불균형을 반드시 해소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국가가 위로부터의 개입이 너무 과하므로 과도한 개입을 종식시키고, 개인의 일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쪽다 틀렸다.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전혀 오늘날 전혀 자유롭지 않다. 또 국가는 너무 적다. 현재의 정부는 발언권이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신자유주의 정부는 외부 개입을 축소시켜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율을 선사하는 자유정부가 아니다. 모두가 늘어만 가는 계약과 규정의 양을 느낄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바로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상징적 행동방식과 확인할 수 있는 권위가 사라지고, 사회윤리가 경쟁지향적 인간상으로 대체되면, 실제로 적자생존이 된다. 제기능을 다하는 국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듯 독립적인 개인도 없다. 우리에겐 다시 동일성과 차이, 집단과 개인, 지시된 동일성과 자유로운 선택의 힘겹지만 꼭 필요한 균형을 회복시킬 정치체제가 필요하다. 이런 사회질서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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