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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패멀라 D.

새로운 시대: 근대의 시작2

20년전 금 세공업자인 요하네스 쿠텐베르크는 유럽에서 지식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교회에 소속된 필경사나 신부들이 열심히 필사한 책을 매년 수천 건씩 팔았다. 필경사 한명이 성경 한권을 필사하는데 3년이 걸렸고, 작은 집 한 채 값이었다. 1435년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사용해 인쇄를 시도했다.  인쇄기를 설치하고, 새로운 금속합금을 만들고, 활자를 주형 하고, 잉크를 이것저것 써보는 등 비밀리에 작업했다. 새로운 활자체를 만들고 주형을 뜨고 인쇄기를 설치하여 성서를 찍어냈다.

책의 가격이 내려갈수 밖에 없었다. 중세에는 염소나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에 글을 썼다. 성경을 만들려면 200마리의 가죽이 필요했다. 종이 만드는 기술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건너오게 된 것은 이슬람세계를 통해서였다. 유럽의 종이 공장은 13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나타났다. 인쇄술은 단순한 발명이 아니었다. 구텐베르크는 자동으로 인쇄할수 있는 일련의 여러 재료와 기술전체를 발명한 것이었다. 상호교환할 수 있는 가동식 금속활자의 거푸집을 만들고, 주조하는 것으로 앞으로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인쇄술은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지식발전을 촉진하면서 인류의 진화를 변화시켰다. 인쇄술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기초를 닦았다.

 

알함브라는 그라나다에 있는 이슬람 궁전이다. 1492년 이슬람 에스파냐의 마지막 지배자인 보아브딜은 대대로 내려오던 궁전을 이미 카톨릭 군주에게 넘겼다. 이베리아 반도를 기독교가 다시 정복했다.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과 함께 이슬람 에스파냐의 800년 역사는 사라져갔다. 무아인의 이베리아 반도지배는 4세기에 걸쳐 종말를 고한다. 에스파냐의 우마이야 왕조는 11세기 초에 무너졌다. 이슬람의 에스파냐의 문화적 우수함은 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하고 난 후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세비야와 그라나다, 톨레도의 지배자들은 코르도바를 지적, 문화적 메카로 만든 예술가 , 학자, 과학자를 끌어들였다. 국토회복운동에 가장 공격적이었던 기독교 국가는 이슬람 에스파냐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카스티야 공국이었다. 카스티야왕 알폰소6세는 소고트왕국 시절 수도였던 톨레도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기독교세력의 계속되는 공격에 타이파 도시국가의 왕들은 북아프리카 알모라베데 왕조에 도움을 청했다. 알모라비데왕은 이슬람과 국경을 이루는 사막에서 군사적 대립으로 연마된 베르베르인 유목민이었다1086년 알모라비데 군대는 알폰소4세를 궤멸했다. 알모라비데 군대가 북아프리카로 철수했자, 타이파 왕국들은 기독교국가로 부터 자신을 방어하지 못했다. 알모라비데는 다시 돌아와 1089년 타이파국가 (무아인이 지배하는 독립적인 도시국가에 수여하는 칭호)를 정복하고 이슬람 에스파냐를 다시 통일했다. 암모라비데가 무슬림 에스파냐를 재통일한 것은 십자군이 시작되는 시기와 일치했다. 교황 우르바누스2세 에게 에스파냐의 국토회복 운동은 또 다른 십자군 운동이었다.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8세를 앞세워 기독교 왕들의 연합은 1212년 무슬림 대도시인 발렌시아,  세비야, 코르도바를 정복했다.1260년 무렵 무슬림이 지배하는 곳은 단 하나의 왕국 그라나다로 줄어들었다.

 

1474년 이사벨1세는 카스니야 왕위를 물려받자 종교적 배타성을 더욱 강화했다. 교황은 전쟁비용을 마련하고자 면죄부 판매를 부추겼다. 프랑스, 아일랜드, 영국의 기사들까지 무어인과의 전쟁에 참가하려고 에스파냐로 몰려들었다. 그러나다전쟁은 1482년에서 1492년까지 계속 되었다. 술탄이었던 무하마드12세는 에스파냐 밖으로 안전하게 도피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이사벨과 페르난도에게 도시를 넘겨주었고, 이로써 800년에 걸친 무슬림 지배는 끝이 났다. 1434년 포르투칼 엔히크 왕자의 종사였던 질 이아네스는 카라벨범선 갑판에서 죽음의 항해를 할 준비를 했다. 포르투칼의 항해자 엔히크 왕자는 선장이나 항해사가 아니었다. 항해사들의 항해를 후원하고 발견한 것을 기록하도록 독려했다. 그는 십자군이자 탐험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 1415년 무슬림 근거지인

모로코와 세우타를 점령했다. 중요한 것은 이슬람 아프리카의 부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이슬람권 나라들을 통과하는 육로를 거치지 않고 무역을 할 수 있는 바닷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엔히크는 12년 동안 열다섯번의 황해끝에 드디어 적도에 도착했다. 포르투칼은 엔히크 덕분에 아프리카 연안지역과 해류에 대한 지식을 확보했고,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했다. 엔히크는 사금, 타조알 같은 이국적인 상품도 인기가 많았지만,  가장 이윤이 남는 장사는 노예였다. 마침내 포르투칼은 아랍과 베네치아의 중개상을 따돌리고, 동인도제도의 향료제도(말루쿠제도)를 찾아 인도양까지 진출했다. 교황 알렉산데르6세는 아조레스제도 서쪽으로 360리그(약 5킬로미터)에 선을 그어놓고, 선 서쪽의 모든 것에 대한 해상권은 에스파냐에 동쪽은 해상권은 포르투칼이 주었다. 해로는 옛 실크로드보다 더빠르고 비용도 덜 덜었다. 포르투칼은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남중국해까지 지배했고, 유럽 최초의 해상제국이 되었다. 15세기말 인류는 전 세계적 차원의 변화를 온 몸으로 맞이할 준비 태세를 했다. 그들은 동양의 보물에 굶주렸다. 혁명적 사고와 강한 무기로 무장하고, 아프리카인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킬 결의를 굳게하고, 동쪽으로 더 멀리 멀리 나아갔다.  마지막 이슬람왕국에 대한 에스파냐 승리에 도취한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서쪽으로 항해해서 동쪽으로 가겠다는 혁명적인 생각을 하는 한 남자를 후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