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욕의 인자를 타고난 인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지나갈 수 없는 산과 지도에 없는 망망대해 뿐이다. 1000년전에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던 바이킹 한 무리가 그린란드에서 항해를 시작해 처음으로 북극해를 건넜다. 당시 지식인층 대부분은 지구가 둥글다면 배가 유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줄곤 항해하면, 아시아 해안가에 도착하리라 가정했다. 목적은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중계상을 우회하는 새로운 무역항로 개척이었다. 아메리카대륙은 발견을 주장하는 유럽인에게만 새로운 대륙이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수천만명의 아메리카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정복자에게는 엄청난 부가 기다리고 있었고, 원주민에게는 엄청난 파괴가 기다렸다. 오스만 튀르크가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는 다시 한번 갈등에 직면했다. 천연자원에 대한 구세계의 열망이 선박건조와 지도 제작, 항해에서 포르투칼과 이스파냐가 이룬 기술발전과 짝을 이루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고립은 더이상 선택이 아니었다. 이후 400년간 유럽 정복자와 신세계 피정복자간에 격렬한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1001년 노르웨이출신 레이프 에이릭손이 북아메리카의 해안가에 당도했다. 바이킹이 항해 원정에 나선 것은 인구가 불어나면서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바이킹 문화의 바탕은 호전성과 전투력이었다.
1만3천년전 아메리카 대륙은 아시아 대륙과 빙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얼음 위로 원시인이 아메리카로 건너왔고, 11세기에 뉴펀드랜드와 래브라도에 거주하던 이누이트와 베오투크족이 그들이 후손이었다. 이누이트는 유목사냥꾼이엇다. 북아메리카에 머물던 바이킹은 잠시 머물다 떠났지만 잔인했다. 바이킹 자신들이 만난 아메리카 원주민을 약골 야만인이라는 뜻의 스크랠링이라고 불렀다. 노르웨이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대량 학살했다. 원주민이 반격을 시도했지만, 돌무기로 철제무기를 상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5세기 로마가 멸망한 이후 동로마제국는 수세기동안 비잔티 제국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제노 황제의 치하에서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자신이 로마의 유산을 이어받은 세계의 중심임을 주창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근동아시아의 교차로라는 지리적 입지 덕분에 수세기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단과 향신료가 그곳에서 거래가 일루어졌고 사람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후추였다. 후추는 금값이었다.
8세기에 이슬람 팽창의 첫물결이 들이닥치면서 비잔티제국은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 비잔티제국은 아랍인과 불가리아인, 마자르족을 차례로 물리치고 영토를 지켰다. 1204년 서구의 기독교 십자군이 콘그탄티노플을 약탈했다. 수세기 동안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비잔티 제국은 14세기 부상한 산흥강국 오스만 튀르크를 더 이상 막아낼수 없었다. 비잔티 제국의 항제 콘스탄티누스11세는 난공불락 요새를 믿고 콘스탄티노플의 안전을 의심하지 않았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2세가 등장하자 상황은 바뀌었다. 메흐메트의 꿈은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를 합한 진정한 세계정복자가 되는 것이었다. 1452년 메흐메트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가장 좁은 병목구간의 유럽지역, 아직 비잔티 제국쪽인 해안에 성채를 건설하면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흑해를 드나드는 모든 선박을 감시하고 통제하고자 했다.
루멜리 요새가 완성되자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플 근방에서 진을 치고 요새를 살폈다. 콘스탄티노플의 유일한 약점은 강물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성벽밑 작은 도랑 뿐이었다. 헝가리 태생의 총기 제조공 우르번을 고용해 총기를 제조하게 했다. 바빌론 성벽을 부술수 있는 대포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오스만제국은 대포를 발사하며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부수었다. 비잔티 제국은 밤낮으로 부서진 성벽을 수리했다. 전쟁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관리하고 보급하는 병참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대포 도입 만큼이나 확기적인 사건이었다. 1000년이 넘도록 콘스탄티노플을 수호하던 요새 바깥벽에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을 통해 보병대가 밀고 들어갔다. 콘스탄티노플은 결국 오스만제국 수중에 떨어졌다. 콘스탄티노플은 고대세계의 마지막 유물이었다. 이슬람 세계를 막아주던 완충지이기도 했다. 중세 기사도의 세계가 화약의 시대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영구적으로 기반을 잡았다.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에 베네치아인은 그 어떤 유럽인들보다 큰 타격을 입었다. 베네치아인은 오스만제국의 위협에 대응하느라 또 다른 무역항로를 개척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사이 포르투칼사람들이 동양의 향신료 시장으로 가는 직항로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대양 한가운데로 진입함으로써 아프리카의 동쪽 해안가와 곶 주위로 흘러내리는 편남풍과 해류에서 벗어나서 편서풍대라 불리는 방풍대로 들어갔다. 아프리카 동해안은 아랍과 힌두인 무역상, 선원들에게 익숙한 곳이었지만, 바스쿠 다가마와 선원들에게는 매우 낯설었다. 아랍의 위대한 항해사 이븐 마지드가 바스쿠 다가마의 배를 인도양을 지나 캘리컷에 무사히 안내했다. 이로써 포르투칼은 무역제국의 주춧돌을 놓았고 아랍은 인도양을 더는 독점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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