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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2)

물론 불가피하게 맨 마지막 순간에 남아있는 가능성을 어디까지 확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긴 하다. 삶에 대한 자율성과 통제력을 유지하게끔 한다는 논리에는 스스로 종말을 앞당기기를 원할 때도 돕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가?  누구나 음식이나 물, 투약이나 치료등을 거부할 경우 그 뜻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게 비록 현대의학의 관성에 맞서 싸우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또 마약성 진통제와 진정제가 죽음을 앞당긴다는 걸 알면서도 고통과 불편을 줄이기 위해 처방하기도 한다. 외부적이고 인공적인 장치를 꺼서 생명연장을 포기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과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내부적이고, 자연적인 기능을 멈출 권리를 부여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연장시키는 실수와 가치있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실수중 어느 것을 더 두려워 하는가?

 

건강한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막는 까닭은 그들의 정신적 고통이 일시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 이다. 안락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실수와 남용을 파히기 위해 무척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 냈다. 우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 여러번 요청한 경우여야 하고, 정신질환 때문이 아니라는 확인을 거쳐야 하고, 다른 의사가 이 모든 조간에 부합한다는 확인을 해주어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페그 선생님은 내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신 분이다. MRI검사 결과 12센티미터가 넘는 육종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육종이 골반을 먹어들어가고 있었다. 골반의 3분의1을 제거했다. 이전까지 그녀는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고, 음악을 연주하고, 사랑스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다. 페그 선생은 다시 회복되어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비록 목발을 짚고 다녔지만. 당시 예순두살이었다. 그녀는 정상생활로 돌아온지 1년반만에 백혈병과 유사한 악성종양 진단을 받았다. 백혈병 치료는 효과가 없었고, 면역력이 떨어진 탓에 고열과 감염을 일으켰다. 골반 암이 재발했고, 간에도 전이가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죽게되리라는 걸 안다'고 했다.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게 없다는 것을 안다고 말할 때는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목표가 뭔지 물었다. 그녀는 '이룰 가능성이 있는 목표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래 두려운 것은 통증이 심해지는 것, 몸을 제어할 능력을 잃는 것,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등등 말을 이어가며 그녀는 목이 매였다. 살날이 얼마남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나는 호스피스케어를 받아 보자고 했다. 호스피스 케어의 목표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환자가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한 최상의 나날을 보낼수 있도록 돕는데 있다고 말했다. 나는 좋은 하루, 그것만으로도 기대할 가치가 아니겠냐고  말했다. 호스피스 케어를 받았다. 호스피스 간호사와 만나 그녀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날을 보낸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 페그 선생의 목표는 일상생활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침대옆에 이동식변기를 가져다 놓았고, 몸을 씻거나 옷을 입혀줄 때 도와줄 도우미도 구해줬다.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모르핀을 처방했지만, 일상적인 문제들을 제어할 수 있게 되자 불안감이 많이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이 사라지기전에 아이들에게 꼭 가르쳐주고 싶은 것들이 남아있었다.  ‘소중한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제자들과 이별하기 전에 조언을 남기는 것이 아내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어요’

 

기술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학자들이 죽는자의 역할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이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이 무엇을 남길지를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은 괜찬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두고 싶어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 페그선생은 죽는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임종3일전까지 그 역할을 했던 그녀는 고열로 의식을 잃은 후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를 반복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결국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날 시간도 다가왔다. 많은 준비를 해왔다고 생각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믿었지만,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매일 관장을 해야했고 침대를 적셨다. 진통제가 머리를 몽롱하고 무겁게 했다. 아버지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싫어했다. 사람들과 만나 의사소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수 없을 만큼 진통이 심했다. 통증에 시달리면 온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차 버렸다.  아버지는 약의 용량을 조절해서 통증을 느끼지 않으면서 혼미해지지 않는 이상적인 조합을 찾으려 애썼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그저 이상적인 느낌을 갖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밤 영화 한편을 보았고 윔블든 대회를 보며 즐겼다. 아버지는 행복해 했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체중은 감소했고 필요한 진통제의 양은 점점 늘어갔다. 내가 아버지이게 맨 마지막 받은 메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에게, 횡설수설 뒤엉킨 메일 미안하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사랑하는 아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