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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1)

용기란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이다. 그리고 지혜란 분별력 있고 신중한 힘이다. 나이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수 있는 용기다. 문제는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운 때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나는 단지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 어려우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나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데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판단해야 한다. 주얼 더글러스 할머니는 난소암이 상당히 크게 자라서 장을 일부 막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의 담당 의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사들은 할머니에 대한 많은 선택지를 갖고 있었다. 종양을 줄이기 위한 새로운 화학요법, 몇가지 수술하는 방법, 수술이나 화학요법을 받지 않는 방법 등,  할머니는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압도되고 말았다.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 했던 질문들을 던졌다.

 

가장 두렵고 걱정스러운게 무엇인지, 할머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걸 이루기 위해 기꺼이 포기할수 있는 것과 그럴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이 그런 질문에 답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는 통증, 구역질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다시 먹을수 있는 능력도 원했다. 무엇보다 다시 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두 번 다시 사는 것처럼 살면서 삶을 즐길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할머니가 앞으로 시간을 좀 더 얻을 가능성을 걸고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별로 많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할머니는 시간에 대한 관점이 변함에 따라 현재,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고통에 대한 최종 척도가 순간순간 느낀 척도들을 합친거라고 여기기 쉽다. 최종 척도를 평가할 때 통증시간은 대개 무시되었다. 대신 최종척도를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는 지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커너먼 박사가 말하는 정점과 종점 규칙’이다. 이는 가장 아팠던 순간과 마지막 순간에 느낀 통증의 척도를 평균낸 것이다. 수많은 연구에서 정점과 종점규칙에 비중을 두는 경향과 고통이 지속되는 기간을 무시하는 경향이 확인되었다이러한 현상은 즐거운 경험에 대해서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연구가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내내 잘하다가 마지막에 시합을 망치는걸 보게되면 경기 전체를 망쳤다고 생각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한 시간 내내 즐거움을 느꼈고, 딱 한 순간만 실망감을 맛봤을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 기억하는 자아는 전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조망할 때 단순히 매 순간을 평균내서 평가하지 않는다. 어차피 삶은 대부분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간다. 인간에게 삶이 의미있는 까닭은 그것이 한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전체적인 구도는 의미있는 순간들, 즉 무엇인가 일어났던 순간들이 모여서 결정된다곁으로 행복해 보이는 삶이 실은 텅비어 있을 수도 있고, 겉으로 곤경에 처한 것 같은 삶이 실은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식축구팬이 마지막 몇분동안 일이 잘 안풀렸다고 해서, 이전 세시간동안 행복했던 시간을 모두 망쳤다고 기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경기가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결말이 중요하다. 우리는 기쁨과 고통을 경험하는 기간에 대해 강력한 신호체계를 갖고 있다. 고통은 짧게, 기쁨은 길게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 기억은 고통이나 기쁨이 가장 강렬했던 순간과 이야기가 끝났을 때의 감정을 가장 뚜렷이 기억하도록 진화해 욌다. 기나긴 고통과 짧은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중에는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정점도 중요하고 종점도 중요하다.

 

할머니는 수술이 가져다줄 고통을 견뎌낼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고, 수술후 상처가 나빠질까봐 두려웠다. 그녀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이 자신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두고, 너무 많은 판돈이 걸린 도박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라는걸 깨달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면, 그녀에게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그저 소소한 일이긴 했지만.  만일 그녀에게 그런 일들을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종양이 자기 몸에 끼치고 있는 영향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런 경험을 몇 번만이라도 더 할수 있다면, 할머니는 많은 것을 견뎌낼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겪고 있는 상태보다 더 나빠질 가능성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는 역류하는 내용물을 빼내고, 장밖에 고이는 물을 배출하는 완화치료 수술만 했다.  할머니는 계속 아래로 아래로 미끌어져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요즘 친구들과 친척들을 하루종일 만날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통증조절은 타이레놀만으로 하고 있엇다. 마약성 진통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잠이 쏟아지는 데다 몸에 힘이 빠져서 사람들과 만날 때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제어하기 위한 개념을 제안한다는 것은 보통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을 진정으로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물리학과 생물학, 그리고 우연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용기란 이 두가지 현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는 힘이다. 우리에게 행동할 여지가 있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범위가 점점 좁아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 명확히 결론을 내려면 몇가지 이해를 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병들고 노쇠한 사람들을 돌보는데서 가장 잔인하게 실패한 것은, 그들이 단지 안전한 환경에서 더 오래 사는 것 이상의 우선 순위와 욕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둘째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나갈 기회를 갖는다는 건, 삶의 의미를 지속시키는데 매우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다. 셋째 삶의 마지막 장에 남아있는 가능성을 혁신적으로 바꾸기 위한 제도, 문화, 그리고 대화방식을 변화시켜 나갈 기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