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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3)

늙어서도 삶을 의미있게 살도록 만든다는 것은 새로운 개념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그냥 안전하게만 돌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상상력과 창의력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일종의 지역협동조합을 만들어 노인들이 계속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 각종 서비스를 비싸지 않은 가격에 제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생활하는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해서 자율성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자율성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특별한 철학을 공유하고 있었다. 자율성에는 여러가지 개념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자유로운 행동을 가리키는 자율성 개념이다. 강압과 제한없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사는 상태이다. 이런 자유야말로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구호이다.  그러나 그런 자유는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도록 되어 있고,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상황과 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유를 더 갖는 것이 덜 갖는 것보다는 나아보이기는 하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양이 삶의 가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안전이라는게 공허한 데다가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목표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자율성도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이와는 다른, 그러나 더 중요한 자율성 개념이 있다고 설파했다.

 

우리가 직면하는 한계와 역경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삶의 주인으로서 자율성을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핵심적 가치이다. 드워킨은 198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쓰고 있다.  ‘ 자율성의 가치는 그것이 만들어 내는 책임감 체계에 달려있다. 자율성은 우리가 일관성 있고, 분명한 각자의 개성, 확신, 관심 등에 따라 자신의 삶을 구체화할 책임을 지도록 만든다' 자율성은 우리가 남에게 이끌려 사는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끌며 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쓸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항상 변화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다. 관심사와 욕구가 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자신의 개성및 충성심과 합치하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갈 자유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자신의 개성과 기억을 지워버릴 위험이 있는 심신의 변화를 가장 끔찍한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데 따른 투쟁은 곧 자신의 삶을 본래의 모습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과거의 나와, 현재 유지하고 싶은 나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릴 만큼 너무 쇠약해지거나, 너무 소진되거나, 너무 종속되는 것을 피하려 한다. 질병과 노화만으로도 이 투쟁은 충분히 힘겹다. 우리가 의지하는 전문가들과 시설들이 이 투쟁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자신의 임무가 안전이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의 선택을 제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삶을 살도록 선택의 범위를 넓혀주는 것이라고 믿는 전문가가 점점 많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루 할아버지는 휠체어에 묶인채 정신병 환자처럼 취급 받으며 지내야 할 운명에 처해있다. 루 할아버지는 레너드 플로렌스센터 포 리빙을 방문해 보고 마음에 들어했다. 다른 곳은 다른 사람과 방을 같이 써야 했다. 사생활을 잃는다는 것은 그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일중 하나였다. 할아버지는 그저 혼자 있는 것을 즐기고 싶어했다. 토머스는 비영리단체인 로버트 우드 존슨재단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에덴 올터너티브요양원과 협력관계를 맺어, 미시시피주 투펠로에 첫 그린하우스를 세웠다. 모든 그린하우스는 적은 규모로 공동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다. 어떤 곳도 주민은 열두명을 넘지 않는다. 플로렌스센터에는 한 층에 린하우스라고 부르는 단위가

두개씩 있다. 한 곳에서 대략 열명 정도의 주민이 함께 생활한다. 실내는 따뜻하고 가정적인 분위기가 나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 평범한 가구와 벽난로가 있는 거실,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먹는 가정적인 식사, 초인종이 달린 현관문 등 보통 집과 흡사하다. 음식, 살림살이, 친구사귀기 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가치있는 삶을 영위할수 있게 하였다. 토머스는 일에 대한 주도권을 경영진이 아닌 일선의 직원에게 넘겼다. 직원들이 몇명의 주민들에게 집중수 있게 하였고, 한 사람이 요리와 청소를 비롯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언제나 돕게 했다. 그 결과 직원들은 기가 맡은 주민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루 할아버지의 동반자가 되는 것은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따뜻하게 포옹하는 인간적인 접촉, 카드게임을 함께 해주고, 산책을 하는 것을 도와주는 정도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도 할아버지는 행복해 한다. 정오가 되면 그린하우스에 같이 사는 사람끼리 식사를 하고, 독서를 한다. 저녁식사 후에는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고요한 밤시간이 좋아요. 모든 게 고요해져요, 음악도 듣기 편한 조용한 것을 골라요. 그리고 나서는 편히 누워 생각에 잠기지요.’ 질병과 노화의 공포는 단지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을 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쇠약해지고 의존적이 되면, 그런 자율성을 갖는 것은 불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배운것은 그것이 분명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루할아버지가 말했다. ‘난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요. 동양에 '카르마'라는 말이 있어요.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는 거예요. 내 삶에 끝이 있는걸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